속회 공과 2012년 6월 29일

“베드로와 요한이 공회 앞에 서다”
사도행전4장1절~22절

베드로와 요한은 예수그리스도가 죽은 자들을 부활시킨다고 가르쳤는데 이것을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이 싫어하여 두 제자를 잡아 가두게 되었다. 그러나 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는 믿는 자가 많아 남자의 수가 오천이나 되었다.

1.산헤드린 공회 앞에 선 제자들은 담대하였습니다. 제자들이 담대한 이유는?

성전 미문 곁에서 구걸하던 남자가 고침을 받았습니다. 항상 다른 사람에게 의지하며 살아온 거지가 구원을 받았습니다. 자리를 박차고 벌떡 일어나 기뻐 뛰며 찬송을 불렀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전해 준 나사렛 예수의 이름이 가져온 기적이었습니다. 이제 이 남자는 베드로와 요한의 뒤를 따라다니는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이 일로 예루살렘 전체에 나사렛 예수의 이름이 더욱더 위력을 떨치게 되었습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점점 더 많아져 오천 명에 육박하게 되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을 비롯한 사도들은 더욱 더 담대하게 나사렛 예수의 주되심과 부활을 힘써 전파했습니다.

그랬더니 당국자들이 간섭해서 방해하기 시작했습니다.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 즉 성전 경비대장과 사두개인들이 몰려와 핍박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제사장들과 사두개인들은 누구나 다 인정하는 종교 엘리트들인데 아무 교육도 받지 못한 갈릴리 어부출신들이 오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휘어잡아 그리스도인으로 만드는 것을 보고서는 격분했던 것입니다.

특히 사두개인들은 죽은 사람의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들로 유명한데 사도들이 나사렛 예수의 부활을 가르치니 더더욱 반대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이들 유대인 종교 지도자들은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아 그 다음 날까지 억류했습니다. 본문 말씀은 베드로와 요한이 투옥된 지 이튿날 아침에 유대 관원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 즉 율법학자들로 구성된, 이스라엘의 대법원이자 국회인 산헤드린 공의회 앞에서 심문을 받는 장면입니다.

<사도들의 뱃장 뒤에는?>

이렇게 해서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에 관여했던 대제사장 안나스와 바나바, 그리고 요한과 알렉산더를 비롯한 그 밖의 대제사장 가문에 속한 지도자들이 대거 참석한 가운데 심문이 벌어졌습니다. 이들 산헤드린 지도자들은 베드로와 요한에게 “도대체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런 일을 하였는가?”라는 첫 번째 질문을 던집니다(7절). 여기서 ‘이런 일’이라 함은 앉은뱅이 거지의 치유와 사도들의 가르침, 두 가지를 의미할 것입니다. 여기에 대한 베드로의 대답은 거침이 없습니다. 도저히 갈릴리 어부 출신의 무식한 사람의 답변이 아닙니다. “하루 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는 속담처럼 어마어마한 공권력을 가진 사람들 앞에서 조금도 주눅이 들지 않고 담대하게 말을 합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요?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8절 말씀대로 성령이 충만했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충만하면 담력이 생기고 지혜가 생겨서 하나님께서 말할 것을 생각나게 하십니다. 어떤 권력이나 총칼 앞에서도 주눅이 들지 않고 진리를 변증할 수 있는 용기와 지혜가 생깁니다.

둘째는 예수님과 함께 다녔기 때문입니다. 13절을 보세요. “그들이 베드로와 요한이 담대하게 말함을 보고 그들을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 또 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줄도 알고.” 사도들은 전혀 학교 교육을 받은 적이 없는 일자무식이었을 뿐 아니라 지극히 평범하고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다녔습니다. 제자가 스승과 함께 있으면 스승과 똑같이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훌륭한 스승 밑에는 훌륭한 제자가 생겨난다는 말이지요. 베드로와 요한이 비록 학문도 없고 출신성분도 빈약한 범인(凡人)이었지만 한 가지 다른 점이 있었습니다. 위대한 스승 예수님과 함께 다녔던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그들로 하여금 전혀 다른 사람들로 바꾸어 놓았던 것이지요.

2. 산헤드린에서 제자들에게 한 경고는?

예수와 함께 다녔을 뿐 아니라 이제 예수님이 보내주신 성령으로 충만해진 베드로가 산헤드린 공회 앞에 행한 변론은 간단하나 힘 있는 것이었습니다.
첫째로, 나면서부터 못 걷는 남자가 몸이 성하게 된 것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힘입어서 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10절). 그런데 이 나사렛 예수를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지만 하나님이 다시 살리셨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산헤드린 지도자들이 모욕했고 처형했던 나사렛 예수의 이름 이외에 이와 같은 권세가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한 것이지요.

둘째로, 시편 118: 22절을 인용하면서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버린 돌과 같았던 나사렛 예수가 하늘 성전, 즉 하나님 나라의 모퉁이돌이 되었다고 주장합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은 유대종교 당국자들에게는 버림받은 돌이었으나 하나님 나라를 건축하는 데는 결정적인 주초가 되었다는 말이지요. 40년 동안 그 누구도 고치지 못했던 앉은뱅이의 병을 나사렛 예수가 고쳤다는 사실을 각인시키면서, 그 예수를 내친 사람들이 바로 당신들이었지만 하나님은 그를 높이셨다는 것입니다.

셋째로, 이와 같이 나사렛 예수의 위대한 이름을 연거푸 강조한 뒤 베드로는 또 한 차례 위대한 선언을 합니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12절). 예수의 이름 밖에는 하늘 아래 우리를 구원할 그 어떤 이름도 없다는 주장입니다. 오직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의지해서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예수’의 이름이 인간의 구원을 위해 절대적인 권세를 가지는 것이지 ‘기독교’라는 종교의 이름이 그와 같이 배타적인 권세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사실, 지난 2천 년 동안의 교회 역사를 보면 기독교 역시 불신앙과 불순종, 교만과 편견, 독선과 고집 등으로 수많은 잘못을 저질러 왔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만이 구원의 유일한 원천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성령이 충만해서 이렇게 거침없이 변론을 한 베드로에 대해서 산헤드린도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병고침을 받은 사람이 사도들 곁에 서 있었으므로 더 이상 트집을 잡을 수가 없었습니다(14절). 사도들이 강변해온 것처럼 40년 동안이나 걷지 못하던 사람이 걸을 수 있게 된 것은 순전히 나사렛 예수의 이름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이 남자가 입증해주었기 때문이지요.
그리하여 이제 할 수 없이 베드로와 요한을 산헤드린에서 나가라고 명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분명한 사실과 증거가 있으니 어찌할 방도가 없었던 것이지요. 16절을 보세요.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할까 그들로 말미암아 유명한 표적 나타난 것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려졌으니 우리도 부인할 수 없는지라.”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진 표적이 너무도 뚜렷했기 때문에 아무도 부인할 수 없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보고 들은 것이 있으니>

이렇게 해서 산헤드린 지도자들은 베드로와 요한을 놓아주기 전에 한 가지 경고만은 확실히 주기로 했습니다. 이 사도적 권능과 표적과 관련된 명성이 더 이상 사람들에게 퍼지지 못하도록 철저히 위협을 해서 이후에는 예수의 이름으로 누구에게도 복음을 전파하지 못하도록 하자는 방안을 세웠던 것입니다(17절). 그래서 산헤드린 지도자들은 즉시 두 사도를 불러서 절대로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고 명령했습니다(18절).

이에 대한 베드로와 요한의 대답이 놀랍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19-20절). 사도들은 당국자들의 권세보다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신 하나님의 권세를 더욱 더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자기들이 나사렛 예수께서 하신 위대한 일을 보고 들은 것이 있기 때문에 결코 당국자들의 협박에 굴복할 뜻이 없음을 분명히 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유대 종교 당국자들은 베드로와 요한을 징벌할 명분을 찾지 못한 나머지 적당히 위협한 뒤 석방시킬 수밖에 없었습니다(21절).

오늘 말씀을 통하여 우리는 세 가지 교훈을 얻습니다.
첫째, 예수님과 함께 있고 성령이 충만하면 어떤 권세자의 위협 앞에서도 두려워 떨지 않는 담력과 지혜를 얻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주님과 교제하는 시간이 길면 길수록, 성령충만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이와 같은 담력과 지혜도 비례해서 커질 것입니다.

둘째,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외에 천하에 구원받을 만한 다른 이름이 없습니다.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붙잡아야지 기독교나 어떤 교파, 선교 단체 등 본질과 원천이 아닌 지엽적인 것을 붙들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셋째,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과 진리에 대해서 보고 들은 바가 분명하면 사람이나 권력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될 수 있습니다

3.지금도 예수이름을 막으려는 적그리스도의 활동은 활발합니다. 나의 결단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