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회 공과 2012년 7월20일

“물건을 통용 하다”
사도행전4장32절~37절

오늘 말씀은 초대교회가 갖고 있었던 아름다운 모습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매우 도전적인 모습입니다. 오늘날 세상에서는 보기 힘든 모습입니다. 우리들도 하기 어려운, 불가능하게 생각되는 모습입니다. 이런 말씀을 읽을 때는 좋은 말씀이긴 한데 우리들과는 전혀 관계없는 말씀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1.초대교회에 나타난 성령 충만함의 모습이 어떻게 나타났습니까?

우리는 초대 교회의 능력을 보았습니다. 박해에 직면했지만 당당히 이겼습니다. 사도들의 담대한 믿음으로, 또한 마음을 합한 기도의 결과로 성령의 권능이 나타났습니다. 본문은 그 다음에 이어지는 물질생활의 모습입니다. 물질생활에 대한 얘기는 오순절 성령강림 직후의 이야기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행2:44-45) 왜 누가는 물질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반복해서 기록하고 있을까요?
은혜 생활은 물질생활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지금까지 관찰해 온 바로는 영적 생활 자체가 뒤져서 실족하는 일은 별로 없었습니다. 기도를 게을리 한다든지, 말씀을 안 본다든지, 예배 생활을 소홀히 하는 것도 근본적인 원인이 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신앙을 실족시키는 직접적인 계기는 삶에서 타나납니다. 예를 들면 돈 문제 때문에 신령한 생활이 타격을 입습니다. 가장 경건하다고 하는 바리새인들조차도 돈에는 약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라 이 모든 것을 듣고 비웃거늘”(눅16:14) 육신의 간음 문제도 그렇습니다. 그 때문에 가정이 깨지고 영적 생활이 무너집니다.

돈 문제는 영적 생활에 매우 큰 영향을 줍니다. 예수님은 보물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다고 하셨습니다.(마6:21) 돈은 사람의 마음을 끌어들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곳곳에서 재물에 대한 경고를 합니다.(마6:19-20, 딤전6:10, 히13:5) 이 돈의 영향력을 애써 감추려 한다면 오히려 부작용이 나타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돈에 대해서 이중적이고 위선적인 태도를 취할 때가 많습니다. 교인들에게 “돈이 중요 하냐, 형제 우애가 중요 하냐?”고 물으면 100% 형제가 중요하다고 정답을 씁니다. 그러나 실제로 돈 문제에 부딪치면 형제보다는 돈을 선택합니다. 부자를 욕하면서 부자 되려고 발버둥 칩니다. 말로는 주님 한 분만으로 만족한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노후 자금 마련을 위해 동분서주 합니다. 돈에 대한 인식을 바로 할 필요가 있습니다.

돈이 하나님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돈이 지상에서 유용한 것은 사실입니다. 구약 시대에 재물은 축복의 큰 증표였습니다. 아브라함도, 이삭도, 야곱도 재물이 많아짐으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보여주었습니다. 신약 시대 성도들은 영혼이 잘 되는 일에 집중합니다. 그렇다고 물질생활이 필요 없어졌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돈의 부작용을 경고한 부분은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시는 복 목록에서 돈이 제외되었다는 말씀은 성경 어디에도 없습니다. 다만 그리스도인들은 돈에서 자유로워져야 합니다. 돈에서 자유롭다는 것은, 돈에 매여 돈의 지배를 받지 않고, 돈을 마음에서 통제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돈을 어떻게 마음에서 통제할 수 있을까? 그것이 숙제입니다.

초대교회는 물질생활의 이상을 보여줍니다. 천국생활의 단면입니다. 어떤 생활일까요? 바로 유무상통의 생활입니다.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they shared everything they had.”(NIV) “all things were common property to them.”(NASB) 서로 공유하고, 서로 나누는 생활! 이렇게 할 수만 있다면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실제로 우리 삶 속에서 이런 생활이 이루어지는 부분이 있습니다. 바로 가정공동체입니다. 가정 속에서는 누가 돈을 벌어왔든지 공유합니다. 그리고 필요를 따라 나눕니다. 그런데 가정 밖으로 나가면 이런 방식은 깨집니다. 한 쪽에서는 비만증에 걸리고, 한 쪽에서는 굶주립니다. 이것을 인위적으로 고치기는 매우 힘듭니다. 그 증거가 바로 공산주의 실험 아닙니까? 억지로 나누라고 하니까 다 거지가 되고 말았어요. 초대교회의 유무상통 생활도 오래 지속되지는 못했습니다. 본문에는 사도들이 분배활동의 주역이 되고 있지만, 사도행전 6장에 보면 사도들은 교회 재정에서 손을 뗍니다. 어쨌든지, 유무상통의 생활은 물질생활의 이상형입니다.

2 물건을 통용한 행위를 설명하여 보시오.

한 마음과 한 뜻이 된 공동체

첫째로, 유무상통의 첫 번째 원리는 마음의 일치입니다. 공동체 구성원이 마음이 하나 될 때 물질 공유도 가능합니다. “믿는 무리가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믿는 무리” 라는 말 중에 “무리”는 가득 찬 무리를 뜻합니다. 숫자가 많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한 마음이 되고, 한 뜻이 되었습니다. “무리”라는 말과 “한 마음 한 뜻”이란 말이 대조되어 있습니다. 마음의 일치가 많은 무리에게 물질을 공유하게 했습니다.
마음의 일치 없이는 물질의 공유가 불가능합니다. 요즘 부부 사이에도 따로 재산이 있다고 합니다. 재산을 따로 소유한다는 것은 그만큼 마음이 따로따로라는 의미입니다. 어른들의 말씀에 동업을 하지 말라는 속담 아닌 속담이 있습니다. 아무리 친한 사람 사이라 해도 돈 때문에 의가 나기 때문입니다. 동업을 하려면 끝까지 마음의 일치가 있어야 합니다. 중국 고사에 관포지교라는 얘기가 있습니다. 중국 제(齊)나라 때 얘기입니다. 관중과 포속이란 친한 친구가 있었습니다. 포숙은 자본을 대고 관중은 경영을 담당하여 동업하였습니다. 그러나 관중이 이익금을 혼자 독차지하였습니다. 남들이 뭐라고 해도 포숙은 관중의 집안이 가난한 탓이라고 너그럽게 이해하였습니다. 함께 전쟁에 나간 적이 있습니다. 관중은 세 번이나 도망을 쳤습니다. 그런데도 포숙은 그를 비겁자라 생각하지 않고 그에게는 늙으신 어머님이 계시기 때문이라고 그를 변명해 줬습니다. 포숙은 관중을 끝까지 믿고 밀어줬습니다. 관중 역시 포숙을 가리켜 “나를 낳은 것은 부모이지만 나를 아는 것은 오직 포숙뿐이다(生我者父母 知我者鮑子也)”라고 고백했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마음을 같이 할 수 있다면 물질을 공유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성도들이 하나 될 수 있는 조건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엡4:4-6) 우선 우리는 몸이 하나입니다.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만국 유일입니다. 두 몸 세 몸이 아닙니다. 한 몸입니다. 우리는 같은 천국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목표가 같습니다. 주님도 하나요, 믿음도 하나입니다. 서로 다른 주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속죄도 같이 받았습니다. 한 하나님 아버지께 속해 있습니다. 같은 성령 같은 영적 질서 아래 살고 있습니다. 이렇게 성도들은 하나 될 수 밖에 없는 조건 속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실한 신앙을 함께 갖고 있다면 누구나 유무상통의 삶을 나눌 수 있습니다. 문제는 이런 신앙을 함께 가지고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미성숙 된 신자들이 많을수록 물질 공유는 힘든 과제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물질관이 같았다

둘째로, 물질관이 같아야 합니다. 초대 교회 교인들이 물질을 공유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물질관이 일치했기 때문입니다.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32) 성도들의 물질관이 뭡니까? “내 재물은 내 것이 아니다!” 바로 그겁니다. 욥의 물질관이 그렇고 사도 바울의 물질관도 똑같습니다. “가로되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욥1:21)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딤전6:7-8) 내가 가진 모든 것 가운데 내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부동산도 내 것이 아닙니다. 현금도도 내 것이 아닙니다. 가족도, 자식도 내 소유는 아닙니다. 심지어는 내 몸, 내 생명도 내 것이 아닙니다.
내 것이 아니면 누구 겁니까? 모든 물질은 하나님 것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셨고, 하나님이 관리하고 계십니다. “땅과 거기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중에 거하는 자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시24:1) “하늘이 주의 것이요 땅도 주의 것이라. 세계와 그 중에 충만한 것을 주께서 건설하셨나이다.”(시89:11)
내 소유가 아닌 것을 임의로 소유하려고 하면 문제가 생깁니다. 소유하려고 할 때에 나타나는 부작용이 뭡니까? 사도 바울의 교훈을 보세요.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딤전6:9-10) 첫째는 소유주이신 하나님께 누가 됩니다. 둘째는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줍니다. 셋째는 자기 자신을 해롭게 합니다. 가장 큰 피해는 내 자신입니다. 시험과 올무에 걸립니다. 마음이 불필요한 욕망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믿음을 잃게 됩니다. 근심의 가시가 생겨 자신을 찌릅니다. 마침내는 멸망합니다.
내 소유가 아니라고 해서 재물을 방치하거나 함부로 다루라는 말은 아닙니다. 오히려 전문적으로 재물을 잘 다룰 줄 알아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는 하나님 집에서 물질의 청지기이기 때문입니다. 청지기가 뭡니까? 관리자요 고용된 직원입니다. 남의 재산을 다루기 때문에 더 조심스럽게 더 잘 관리해야 합니다. 신약 성경에 보면 청지기에 대한 교훈이 몇 군데 나옵니다. “주께서 가라사대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가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종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줄 자가 누구냐?”(눅12:42)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같이 서로 봉사하라”(벧전4:10) 여기 “청지기”란 말 앞에 몇 가지 수식어가 붙어 있습니다. 지혜로운 청지기, 진실한 청지기, 선한 청지기 등입니다. 남의 재산을 관리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진실해야 합니다. 선량해야 합니다. 또한 지혜로워야 됩니다. 그런 사례가 성경에 있습니다. 야곱과 요셉입니다. 야곱은 외삼촌의 양떼를 돌보면서 품삯을 열 번이나 못 받았습니다. 그래도 외삼촌의 양을 성실하게 돌아보았습니다. “야곱이 그에게 이르되 내가 어떻게 외삼촌을 섬겼는지, 어떻게 외삼촌의 짐승을 쳤는지 외삼촌이 아시나이다. 내가 오기 전에는 외삼촌의 소유가 적더니 번성하여 떼를 이루었나이다. 나의 공력을 따라 여호와께서 외삼촌에게 복을 주셨나이다.”(창30:29-30) “내가 이 이십 년에 외삼촌과 함께 하였거니와 외삼촌의 암양들이나 암염소들이 낙태하지 아니하였고 또 외삼촌의 양 떼의 숫양을 내가 먹지 아니하였으며, 물려 찢긴 것은 내가 외삼촌에게로 가져가지 아니하고 스스로 그것을 보충하였으며 낮에 도적을 맞았든지 밤에 도적을 맞았든지 내가 외삼촌에게 물어내었으며, 내가 이와 같이 낮에는 더위를 무릅쓰고 밤에는 추위를 당하며 눈 붙일 겨를도 없이 지내었나이다.”(창31:38-40) 요셉은 시위대장 보디발의 집에 종으로 들어가서 청지기 역할을 했습니다. 얼마나 진실하고, 선량했으면 주인이 요셉에게 집안 재산을 다 맡겼겠습니까? 보디발만 그런 게 아닙니다. 감옥의 전옥도 그랬고, 바로 왕도 그랬습니다. “주인이 그 소유를 다 요셉의 손에 위임하고 자기 식료 외에는 간섭하지 아니하였더라”(창39:6) “전옥이 옥중 죄수를 다 요셉의 손에 맡기므로 그 제반 사무를 요셉이 처리하고”(창39:22) “바로가 또 요셉에게 이르되 내가 너로 애굽 온 땅을 총리하게 하노라 하고, 자기의 인장 반지를 빼어 요셉의 손에 끼우고”(창41:41-42)
재물은 하나님 소유입니다. 우리는 하니님 재산을 맡은 청지기입니다. 그러므로 진실하게, 선한 의도로, 지혜롭게 관리해야 됩니다. 초대교회는 이런 물질관을 공유했기 때문에 유무상통 할 수 있었습니다. 부부 사이에도 물질관이 다르면 심각한 갈등이 일어납니다. 하물며 교인 사이에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하나님 자녀다운 물질관을 갖도록 함께 노력합시다.

교회 중심의 구제 활동입니다

초대교회가 유무상통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교회가 중심이 된 구제활동을 했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물질생활의 중심에 있습니다. 교회가 중심에 있었다는 것은 두 가지 특징으로 나타납니다.
첫째는 사도들의 지도적 역할입니다. 사도행전 2장과 4장을 비교해 보면 약간의 차이가 나타납니다. 2장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고”(행2:44-45) 여기서는 구제의 주체가 각 개인입니다. 각자 알아서 재산을 팔아 나눠줄 사람에게 나눠줬습니다. 그런데 4장은 좀 다릅니다. “그 중에 핍절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저희가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줌이러라.”(34-35) 구제의 주체가 교회가 됩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 사도들의 역할이 있습니다. 사도들이 중심이 되었다는 것은 곧, 영적 지도자가 중심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구제 활동은 영적 활동의 통제 아래에 있습니다. 반대로 물질 구제가 중심이 되고 영적 활동이 종속되어서는 안 됩니다. 교회와 구제 기관이 다른 것이 바로 그 점입니다. 누가 뭐래도 교회의 첫째 목표는 예배입니다. 교회는 예배를 위한 공동체입니다. 전도를 위한 공동체입니다. 코이노니아(성도의 교제)가 있고, 양육이 있고, 그 다음에 봉사활동이 있습니다. 아무튼지 구제는 교회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개인이 개인을 구제하는 것은 가장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도와주는 사람과 도움을 받는 사람이 피차 유익이 없습니다. 받는 사람은 부담스럽고, 주는 사람은 공명심에 빠집니다. 그러므로 항상 교회 중심, 사도 중심의 구제에 참여하시기 바랍니다.
둘째는 자원적인 헌금입니다. 공산주의자들이 성경에서 유일하게 좋아한 구절이 바로 본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초대교회를 가리켜 “기독교 공산주의”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공산당과 초대교회는 전혀 다릅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교회는 영적 지도자 중심이지 정치 지도자 중심이 아닙니다. 뿐만 아니라 공산당은 남의 것을 강제로 빼앗아 나눠가졌지만, 교회는 자발적인 헌금으로 나눠줬습니다. 남의 것을 강제로 빼앗는 것과, 자발적으로 헌금하는 것이 어떻게 같은 사상이 될 수 있습니까? 남이 노력한 가치를 평가하지 않는 것이 공산당입니다. 어떤 성공도, 권세도, 노력도 인정하지 않습니다. 함께 나누는 것만이 지상 목표입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함께 거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북한을 보세요. 도대체 무엇을 공유하고 있다는 말입니까? 김정일은 외제 승용차가 수 백 대씩 되는데, 백성들은 굶어죽고 있습니다. 그게 공유입니까? 요즘도 그런 식으로 자선 사업 하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자기가 힘써 번 돈으로 구제하지 않고, 남의 소유를 뺏어서 구제하려고 합니다. 억지로 물건 강매하고, 강제 모금하고…. 공산당식 방법입니다.
공동체가 약자를 제대로 도울 때에 물질 공유가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그것은 강제가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은혜 받은 사람들이 주머니를 열 때에 가능합니다. 바로 그 모범적인 사례가 본문에 나타나는 바나바의 헌금입니다. 바나바의 본명은 요셉입니다. 지금의 키프로스 출신의 레위 지파 사람입니다. 구약시대에 보면 레위인은 재산을 소유하지 못하도록 했는데, 신약시대에는 그 조항이 지켜지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바나바는 예루살렘에 친척도 있고, 재산도 있었습니다. 바나바란 이름은 히브리식입니다. 헬라어로는 “paravklhsi”” (파라클레시스)라고 했는데, 위로자란 뜻입니다. 히브리식의 바나바란 말은 두 가지 설이 있습니다.

첫째는 “Bar-nawcha”(son of refreshment)라는 말로 위로자(consolation)란 뜻으로 해석합니다.
둘째는 “Bar-nebiyya”(son of prophet)로 “권하는 자”(exhortation)란 뜻입니다.

바나바는 선지자였고(13:1,11:23) 또한 권면하고 위로하는 자였습니다.(고전14:3,행15:32) 바나바는 예루살렘 교회와 이방 교회의 다리 역할을 했던 아주 중요한 인물입니다. 그는 회개한 사도 바울을 예루살렘의 사도들에게 소개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또한 바울과 함께 안디옥 교회를 세우고 최초의 이방 선교사로 나갔습니다.(행13:2) 일차 선교지에 키프로스 섬이 포함된 것은 그의 고향이었기 때문인 듯합니다. 그는 1차 선교여행 후에 예루살렘 종교회의에 참석했습니다.(행15:1) 그의 인품은 매우 고매하고, 관용적이었습니다. 이런 바나바가 자신의 재산을 팔아 사도들 발 앞에 갖다 놓은 것은 자연스런 결과입니다. 바나바의 신앙과 헌금은 바로 뒤에 이어지는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의 헌금과 크게 대조됩니다. 참 신앙의 헌금과 신앙 없는 헌금이 어떻게 다른가?

재산을 누리는 이상적 형태는 공동체가 공유하고 유무상통하는 모습입니다. 그러나 유무상통은 지상에서 실천하기에는 너무 벅찬 형태입니다. 실현할 수만 있다면 최선의 모습입니다. 초대교회는 그것을 실험했습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조건이 있었습니다. 첫째로, 공동체 구성원이 한 마음 한 뜻이 되었습니다. 둘째로, 물질관이 같았습니다. 셋째로, 교회 중심, 즉 사도 중심 자원 헌금 중심의 구제활동입니다.

3.우리는 오늘 날 어떻게 초대교회를 본 받을 수 있나?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을 찾아보자.

초기 교회의 유무상통

앞선 부분에서 우리는 초대 교회의 능력을 보았습니다. 박해에 직면했지만 당당히 이겼습니다. 사도들의 담대한 믿음으로, 또한 마음을 합한 기도의 결과로 성령의 권능이 나타났습니다. 본문은 그 다음에 이어지는 물질생활의 모습입니다. 물질생활에 대한 얘기는 오순절 성령강림 직후의 이야기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행2:44-45) 왜 누가는 물질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반복해서 기록하고 있을까요?
은혜 생활은 물질생활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지금까지 관찰해 온 바로는 영적 생활 자체가 뒤져서 실족하는 일은 별로 없었습니다. 기도를 게을리 한다든지, 말씀을 안 본다든지, 예배 생활을 소홀히 하는 것도 근본적인 원인이 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신앙을 실족시키는 직접적인 계기는 삶에서 타나납니다. 예를 들면 돈 문제 때문에 신령한 생활이 타격을 입습니다. 가장 경건하다고 하는 바리새인들조차도 돈에는 약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라 이 모든 것을 듣고 비웃거늘”(눅16:14) 육신의 간음 문제도 그렇습니다. 그 때문에 가정이 깨지고 영적 생활이 무너집니다.
돈 문제는 영적 생활에 매우 큰 영향을 줍니다. 예수님은 보물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다고 하셨습니다.(마6:21) 돈은 사람의 마음을 끌어들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곳곳에서 재물에 대한 경고를 합니다.(마6:19-20, 딤전6:10, 히13:5) 이 돈의 영향력을 애써 감추려 한다면 오히려 부작용이 나타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돈에 대해서 이중적이고 위선적인 태도를 취할 때가 많습니다. 교인들에게 “돈이 중요 하냐, 형제 우애가 중요 하냐?”고 물으면 100% 형제가 중요하다고 정답을 씁니다. 그러나 실제로 돈 문제에 부딪치면 형제보다는 돈을 선택합니다. 부자를 욕하면서 부자 되려고 발버둥 칩니다. 말로는 주님 한 분만으로 만족한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노후 자금 마련을 위해 동분서주 합니다. 돈에 대한 인식을 바로 할 필요가 있습니다.
돈이 하나님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돈이 지상에서 유용한 것은 사실입니다. 구약 시대에 재물은 축복의 큰 증표였습니다. 아브라함도, 이삭도, 야곱도 재물이 많아짐으로 하나님의 축복을 보여주었습니다. 신약 시대 성도들은 영혼이 잘 되는 일에 집중합니다. 그렇다고 물질생활이 필요 없어졌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돈의 부작용을 경고한 부분은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축복 목록에서 돈이 제외되었다는 말씀은 성경 어디에도 없습니다. 다만, 그리스도인들은 돈에서 자유로워져야 합니다. 돈에서 자유롭다는 것은, 돈에 매여 돈의 지배를 받지 않고, 돈을 마음에서 통제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돈을 어떻게 마음에서 통제할 수 있을까? 그것이 숙제입니다.
초대교회는 물질생활의 이상을 보여줍니다. 천국생활의 단면입니다. 어떤 생활일까요? 바로 유무상통의 생활입니다.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they shared everything they had.”(NIV) “all things were common property to them.”(NASB) 서로 공유하고, 서로 나누는 생활! 이렇게 할 수만 있다면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실제로 우리 삶 속에서 이런 생활이 이루어지는 부분이 있습니다. 바로 가정공동체입니다. 가정 속에서는 누가 돈을 벌어왔든지 공유합니다. 그리고 필요를 따라 나눕니다. 그런데 가정 밖으로 나가면 이런 방식은 깨집니다. 한 쪽에서는 비만증에 걸리고, 한 쪽에서는 굶주립니다. 이것을 인위적으로 고치기는 매우 힘듭니다. 그 증거가 바로 공산주의 실험 아닙니까? 억지로 나누라고 하니까 다 거지가 되고 말았어요. 초대교회의 유무상통 생활도 오래 지속되지는 못했습니다. 본문에는 사도들이 분배활동의 주역이 되고 있지만, 사도행전 6장에 보면 사도들은 교회 재정에서 손을 뗍니다. 어쨌든지, 유무상통의 생활은 물질생활의 이상형입니다.
그러면 초대교회는 어떻게 이런 생활을 실현할 수 있었을까요? 이유가 있습니다. 오늘 그 이유를 살펴보면서 물질생활에서 보다 자유롭고 신령해지시기 바랍니다.

한 마음과 한 뜻이 된 공동체

첫째로, 유무상통의 첫 번째 원리는 마음의 일치입니다. 공동체 구성원이 마음이 하나 될 때 물질 공유도 가능합니다. “믿는 무리가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Tou’ de; plhvqou” tw’n pisteusavntwn h\n kardiva kai; yuch; miva” “And the congregation of those who believed were of one heart and soul”(NASB) “믿는 무리”(Tou’ de; plhvqou” tw’n pisteusavntwn )라는 말 중에 “무리”(plhvqou”)는 가득찬 무리를 뜻합니다. 숫자가 많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한 마음(h\n kardiva, one heart)이 되고, 한 뜻(yuch; miva, one soul)이 되었습니다. “무리”라는 말과 “한 마음 한 뜻”이란 말이 대조되어 있습니다. 마음의 일치가 많은 무리에게 물질을 공유하게 했습니다.
마음의 일치 없이는 물질의 공유가 불가능합니다. 요즘 부부 사이에도 따로 재산이 있다고 합니다. 재산을 따로 소유한다는 것은 그만큼 마음이 따로따로라는 의미입니다. 어른들의 말씀에 동업을 하지 말라는 속담 아닌 속담이 있습니다. 아무리 친한 사람 사이라 해도 돈 때문에 의가 나기 때문입니다. 동업을 하려면 끝까지 마음의 일치가 있어야 합니다. 중국 고사에 관포지교라는 얘기가 있습니다. 중국 제(齊)나라 때 얘기입니다. 관중과 포속이란 친한 친구가 있었습니다. 포숙은 자본을 대고 관중은 경영을 담당하여 동업하였습니다. 그러나 관중이 이익금을 혼자 독차지하였습니다. 남들이 뭐라고 해도 포숙은 관중의 집안이 가난한 탓이라고 너그럽게 이해하였습니다. 함께 전쟁에 나간 적이 있습니다. 관중은 세 번이나 도망을 쳤습니다. 그런데도 포숙은 그를 비겁자라 생각하지 않고 그에게는 늙으신 어머님이 계시기 때문이라고 그를 변명해 줬습니다. 포숙은 관중을 끝까지 믿고 밀어줬습니다. 관중 역시 포숙을 가리켜 “나를 낳은 것은 부모이지만 나를 아는 것은 오직 포숙뿐이다(生我者父母 知我者鮑子也)”라고 고백했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마음을 같이 할 수 있다면 물질을 공유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성도들이 하나 될 수 있는 조건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엡4:4-6) 우선 우리는 몸이 하나입니다.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만국 유일입니다. 두 몸 세 몸이 아닙니다. 한 몸입니다. 우리는 같은 천국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목표가 같습니다. 주님도 하나요, 믿음도 하나입니다. 서로 다른 주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속죄도 같이 받았습니다. 한 하나님 아버지께 속해 있습니다. 같은 성령 같은 영적 질서 아래 살고 있습니다. 이렇게 성도들은 하나 될 수 밖에 없는 조건 속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실한 신앙을 함께 갖고 있다면 누구나 유무상통의 삶을 나눌 수 있습니다. 문제는 이런 신앙을 함께 가지고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미성숙 된 신자들이 많을수록 물질 공유는 힘든 과제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물질관이 같았다

둘째로, 물질관이 같아야 합니다. 초대 교회 교인들이 물질을 공유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물질관이 일치했기 때문입니다.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32) 성도들의 물질관이 뭡니까? “내 재물은 내 것이 아니다!” 바로 그겁니다. 욥의 물질관이 그렇고 사도 바울의 물질관도 똑같습니다. “가로되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욥1:21)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딤전6:7-8) 내가 가진 모든 것 가운데 내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부동산도 내 것이 아닙니다. 현금도도 내 것이 아닙니다. 가족도, 자식도 내 소유는 아닙니다. 심지어는 내 몸, 내 생명도 내 것이 아닙니다.
내 것이 아니면 누구 겁니까? 모든 물질은 하나님 것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셨고, 하나님이 관리하고 계십니다. “땅과 거기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중에 거하는 자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시24:1) “하늘이 주의 것이요 땅도 주의 것이라. 세계와 그 중에 충만한 것을 주께서 건설하셨나이다.”(시89:11)
내 소유가 아닌 것을 임의로 소유하려고 하면 문제가 생깁니다. 소유하려고 할 때에 나타나는 부작용이 뭡니까? 사도 바울의 교훈을 보세요.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딤전6:9-10) 첫째는 소유주이신 하나님께 누가 됩니다. 둘째는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줍니다. 셋째는 자기 자신을 해롭게 합니다. 가장 큰 피해는 내 자신입니다. 시험과 올무에 걸립니다. 마음이 불필요한 욕망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믿음을 잃게 됩니다. 근심의 가시가 생겨 자신을 찌릅니다. 마침내는 멸망합니다.
내 소유가 아니라고 해서 재물을 방치하거나 함부로 다루라는 말은 아닙니다. 오히려 전문적으로 재물을 잘 다룰 줄 알아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는 하나님 집에서 물질의 청지기이기 때문입니다. 청지기가 뭡니까? 관리자요 고용된 직원입니다. 남의 재산을 다루기 때문에 더 조심스럽게 더 잘 관리해야 합니다. 신약 성경에 보면 청지기에 대한 교훈이 몇 군데 나옵니다. “주께서 가라사대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가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종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줄 자가 누구냐?”(눅12:42)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같이 서로 봉사하라”(벧전4:10) 여기 “청지기”란 말 앞에 몇 가지 수식어가 붙어 있습니다. 지혜로운 청지기, 진실한 청지기, 선한 청지기 등입니다. 남의 재산을 관리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진실해야 합니다. 선량해야 합니다. 또한 지혜로워야 됩니다. 그런 사례가 성경에 있습니다. 야곱과 요셉입니다. 야곱은 외삼촌의 양떼를 돌보면서 품삯을 열 번이나 못 받았습니다. 그래도 외삼촌의 양을 성실하게 돌아보았습니다. “야곱이 그에게 이르되 내가 어떻게 외삼촌을 섬겼는지, 어떻게 외삼촌의 짐승을 쳤는지 외삼촌이 아시나이다. 내가 오기 전에는 외삼촌의 소유가 적더니 번성하여 떼를 이루었나이다. 나의 공력을 따라 여호와께서 외삼촌에게 복을 주셨나이다.”(창30:29-30) “내가 이 이십 년에 외삼촌과 함께 하였거니와 외삼촌의 암양들이나 암염소들이 낙태하지 아니하였고 또 외삼촌의 양 떼의 숫양을 내가 먹지 아니하였으며, 물려 찢긴 것은 내가 외삼촌에게로 가져가지 아니하고 스스로 그것을 보충하였으며 낮에 도적을 맞았든지 밤에 도적을 맞았든지 내가 외삼촌에게 물어내었으며, 내가 이와 같이 낮에는 더위를 무릅쓰고 밤에는 추위를 당하며 눈 붙일 겨를도 없이 지내었나이다.”(창31:38-40) 요셉은 시위대장 보디발의 집에 종으로 들어가서 청지기 역할을 했습니다. 얼마나 진실하고, 선량했으면 주인이 요셉에게 집안 재산을 다 맡겼겠습니까? 보디발만 그런 게 아닙니다. 감옥의 전옥도 그랬고, 바로 왕도 그랬습니다. “주인이 그 소유를 다 요셉의 손에 위임하고 자기 식료 외에는 간섭하지 아니하였더라”(창39:6) “전옥이 옥중 죄수를 다 요셉의 손에 맡기므로 그 제반 사무를 요셉이 처리하고”(창39:22) “바로가 또 요셉에게 이르되 내가 너로 애굽 온 땅을 총리하게 하노라 하고, 자기의 인장 반지를 빼어 요셉의 손에 끼우고”(창41:41-42)
재물은 하나님 소유입니다. 우리는 하니님 재산을 맡은 청지기입니다. 그러므로 진실하게, 선한 의도로, 지혜롭게 관리해야 됩니다. 초대교회는 이런 물질관을 공유했기 때문에 유무상통 할 수 있었습니다. 부부 사이에도 물질관이 다르면 심각한 갈등이 일어납니다. 하물며 교인 사이에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하나님 자녀다운 물질관을 갖도록 함께 노력합시다.

교회 중심의 구제 활동입니다

초대교회가 유무상통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교회가 중심이 된 구제활동을 했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물질생활의 중심에 있습니다. 교회가 중심에 있었다는 것은 두 가지 특징으로 나타납니다.
첫째는 사도들의 지도적 역할입니다. 사도행전 2장과 4장을 비교해 보면 약간의 차이가 나타납니다. 2장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고”(행2:44-45) 여기서는 구제의 주체가 각 개인입니다. 각자 알아서 재산을 팔아 나눠줄 사람에게 나눠줬습니다. 그런데 4장은 좀 다릅니다. “그 중에 핍절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저희가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줌이러라.”(34-35) 구제의 주체가 교회가 됩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 사도들의 역할이 있습니다. 사도들이 중심이 되었다는 것은 곧, 영적 지도자가 중심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구제 활동은 영적 활동의 통제 아래에 있습니다. 반대로 물질 구제가 중심이 되고 영적 활동이 종속되어서는 안 됩니다. 교회와 구제 기관이 다른 것이 바로 그 점입니다. 누가 뭐래도 교회의 첫째 목표는 예배입니다. 교회는 예배를 위한 공동체입니다. 전도를 위한 공동체입니다. 코이노니아(성도의 교제)가 있고, 양육이 있고, 그 다음에 봉사활동이 있습니다. 아무튼지 구제는 교회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개인이 개인을 구제하는 것은 가장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도와주는 사람과 도움을 받는 사람이 피차 유익이 없습니다. 받는 사람은 부담스럽고, 주는 사람은 공명심에 빠집니다. 그러므로 항상 교회 중심, 사도 중심의 구제에 참여하시기 바랍니다.
둘째는 자원적인 헌금입니다. 공산주의자들이 성경에서 유일하게 좋아한 구절이 바로 본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초대교회를 가리켜 “기독교 공산주의”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공산당과 초대교회는 전혀 다릅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교회는 영적 지도자 중심이지 정치 지도자 중심이 아닙니다. 뿐만 아니라 공산당은 남의 것을 강제로 빼앗아 나눠가졌지만, 교회는 자발적인 헌금으로 나눠줬습니다. 남의 것을 강제로 빼앗는 것과, 자발적으로 헌금하는 것이 어떻게 같은 사상이 될 수 있습니까? 남이 노력한 가치를 평가하지 않는 것이 공산당입니다. 어떤 성공도, 권세도, 노력도 인정하지 않습니다. 함께 나누는 것만이 지상 목표입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함께 거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북한을 보세요. 도대체 무엇을 공유하고 있다는 말입니까? 김정일은 외제 승용차가 수 백 대씩 되는데, 백성들은 굶어죽고 있습니다. 그게 공유입니까? 요즘도 그런 식으로 자선 사업 하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자기가 힘써 번 돈으로 구제하지 않고, 남의 소유를 뺏어서 구제하려고 합니다. 억지로 물건 강매하고, 강제 모금하고…. 공산당식 방법입니다.
공동체가 약자를 제대로 도울 때에 물질 공유가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그것은 강제가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은혜 받은 사람들이 주머니를 열 때에 가능합니다. 바로 그 모범적인 사례가 본문에 나타나는 바나바의 헌금입니다. 바나바의 본명은 요셉입니다. 지금의 키프로스 출신의 레위 지파 사람입니다. 구약시대에 보면 레위인은 재산을 소유하지 못하도록 했는데, 신약시대에는 그 조항이 지켜지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바나바는 예루살렘에 친척도 있고, 재산도 있었습니다. 바나바란 이름은 히브리식입니다. 헬라어로는 “paravklhsi”” (파라클레시스)라고 했는데, 위로자란 뜻입니다. 히브리식의 바나바란 말은 두 가지 설이 있습니다. 첫째는 “Bar-nawcha”(son of refreshment)라는 말로 위로자(consolation)란 뜻으로 해석합니다. 둘째는 “Bar-nebiyya”(son of prophet)로 “권하는 자”(exhortation)란 뜻입니다. 바나바는 선지자였고(13:1,11:23) 또한 권면하고 위로하는 자였습니다.(고전14:3,행15:32) 바나바는 예루살렘 교회와 이방 교회의 다리 역할을 했던 아주 중요한 인물입니다. 그는 회개한 사도 바울을 예루살렘의 사도들에게 소개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또한 바울과 함께 안디옥 교회를 세우고 최초의 이방 선교사로 나갔습니다.(행13:2) 일차 선교지에 키프로스 섬이 포함된 것은 그의 고향이었기 때문인 듯합니다. 그는 1차 선교여행 후에 예루살렘 종교회의에 참석했습니다.(행15:1) 그의 인품은 매우 고매하고, 관용적이었습니다. 이런 바나바가 자신의 재산을 팔아 사도들 발 앞에 갖다 놓은 것은 자연스런 결과입니다. 바나바의 신앙과 헌금은 바로 뒤에 이어지는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의 헌금과 크게 대조됩니다. 참 신앙의 헌금과 신앙 없는 헌금이 어떻게 다른가?

재산을 누리는 이상적 형태는 공동체가 공유하고 유무상통하는 모습입니다. 그러나 유무상통은 지상에서 실천하기에는 너무 벅찬 형태입니다. 실현할 수만 있다면 최선의 모습입니다. 초대교회는 그것을 실험했습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조건이 있었습니다. 첫째로, 공동체 구성원이 한 마음 한 뜻이 되었습니다. 둘째로, 물질관이 같았습니다. 셋째로, 교회 중심, 즉 사도 중심 자원 헌금 중심의 구제활동입니다. 가정 속에서, 교회 속에서 물질에 매이지 않고, 물질을 다스리면서 살아가는 능력 있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