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회공과 2012년 7월 27일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도행전5장1절~11절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부부로서 함께 은혜를 받은 자로서 베드로에게 땅을 바치면서 초대교회에 기여하고 싶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막상 땅을 팔고 나서는 그 받은 것에 얼마를 속여 베드로 앞에 내놓았을 때 베드로는 호통을 칩니다.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1.초대교회에 있어서 이 사건이 가지고 있는 의미는?
그리스도인들을 가리켜 [성도]라고 부릅니다. 성도란 세상에서 따로 불러낸 거룩한 무리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의 삶의 능력은 거룩함에 있는 것입니다. 거룩이라는 말이 hagios 인데, 그 속에는 (doxa)(영광)와 eulogia(찬양)가 함축되어 있습니다. 즉 우리의 삶의 목적이 언제나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고자 하는 태도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파스칼(Pascal)은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서 대접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해석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다 아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속이지 않는 것이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접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의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죄는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접하지 않을 뿐 아니라 하나님을 속이는 것이였습니다.
올리버 웬델 홈즈(Oliver Wendell Holmes)는 “죄는 많은 연장을 가지고 있지만 거짓말은 모든 연장에 들어맞는 손잡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속이는 것은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능력있는 삶을 살 수 없을 뿐 아니라 자신을 괴롭히는 것입니다.
다윗은 말합니다. “내가 토설치 아니할 때에” 이 말은 뭔가 하니 숨겼을 때에 거짓이 있을 때에, 내가 하나님 앞에 뭔가 깊은 죄악을 숨기고 있을 때에,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뼈가 쇠했다. 성경에 보면 이 고통에 대해서 말하면서 뼈가 마른다. 뼈의 진액이 마른다고 하였습니다.
뼈는 히브리 원문대로 척추입니다. 척추가 말라버린다는 것입니다. 저는 의사가 아니니까 잘 모릅니다. 그런데 전문가의 말을 보니까 척추가 피를 생산하고, 피를 맑게 하고, 척추가 호르몬을 만든다고 합니다. 모든 신경을 전부 척추가 주관한다고 합니다. 뼈가 마른다면 이건 끝난 거예요. 이걸 알아야됩니다. 그러니까 몸도 병듭니다. 얼굴이 죽어 가는 거예요. 균형이 깨져나가는 거예요. 이걸 아셔야됩니다.
내가 진실을 잃어버리고 거룩을 잃어버렸더니 뼈가 말라버리더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중요한 얘기입니까? 주의 손이 나를 눌러서 진액이 화하여 여름 가물에 마름같이 되었나이다. 얼마나 고통스러웠는가를 이렇게 피력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그리스도인이 능력있는 삶을 살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낼 수 없는 것입니다.
교회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접하지 못하면 하나님의 공동체는 능력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다스리는 원칙은 거룩함입니다. 시편93편5절에 다음과 같이 선포되어 있습니다. “거룩함이 주의 집에 합당하여 영구하리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거룩함을 유지하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으로 일하십니다.
출애굽기 29:43-44절에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거기서 이스라엘 자손을 만나리니 내 영광을 인하여 회막이 거룩하게 될지라 내가 그 회막과 단을 거룩하게 하며”
나중에 다윗도 예루살렘에 지어질 성전이 “거룩한 집”(우리 말 성경에는 “성전”으로 나와있음)이 될 것을 알았습니다.(대상29:3) 이와 마찬가지로 고린도전서 3:17절에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교회의 능력의 근원은 하나님 앞에서의 정직과 거룩함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함을 나타내는 공동체를 깨뜨리고 파괴하려는 죄를 단호하게 처리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는 아직 어린 상태입니다. 사도행전 2장을 통해서 신약교회가 탄생합니다. 교회가 아직 어린 아이와 같은 상태입니다. 사람의 인격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시기가 어린아이 때입니다. “세살 버릇이 여든까지 간다”는 우리 말 속담이 있는데 어릴 때 아이에게 어떻게 무엇을 가르쳤는가가 평생 그 아이의 의식을 결정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생명을 앗아가면서까지 하나님의 교회가 하나님의 교회로서 능력있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죄를 용납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처음부터 엄격하게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이와같은 예가 구약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400년동안 애굽에 종노릇하면서 종교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출애굽을 통해 갓 자유를 맛보고 하나님을 섬기기 시작합니다. 어린 아이와 같은 광야 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다스리는 모습을 보면 굉장히 무섭게 다스립니다.
레위기서 10장에 보면 성막이 건립된 직후에 나답과 아비후가 하나님이 명하지 않은 다른 불을 가지고 하나님께 드릴려고 했습니다. 아무도 몰랐습니다. 당사자들만 알았습니다. 자기들 생각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다루셨습니까? 불이 나와서 나답과 아비후를 삼켜버렸습니다.
여리고를 정복한 후 아간이 시날 산 외투한 벌과 은과 금을 탐냄으로써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였습니다. 이것 때문에 아이성에서의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패배하였습니다. 그 원인이 아간의 불순종 때문이라는 것이 밝혀졌을 때 하나님은 어떻게 다루셨습니까? 땅이 갈라져서 아간을 삼켜버렸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볼 때 하나님께서 교훈하시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게 됩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통하여 온 백성이 하나님을 두려워 하게 하였고, 하나님 백성들의 공동체를 파괴시키는 죄를 단호하게 처리함으로서 하나님의 공동체의 능력이 거룩함에 있다는 것을 나타내셨던 것입니다.
에베소서 4:3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교회를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고 하였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죄는 하나님의 공동체인 교회에 해를 끼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이들의 죄를 처리하심으로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11절 다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 다 크게 두 려워하니라”
13절 “그들과 상종하는 사람이 없으나 백성이 칭송하더라
14절 “믿고 주께로 나오는 자가 더 많으니 남녀의 큰 무리더라”
이 사건이 나고 나니까 온 교회가 두려워했어요. 얼마나 그것이 충격이었겠어요. 사람들이 그들과 상종하는 사람들은 없었지만 그러나 백성들로부터 칭송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믿고 주께로 돌아오는 자가 많았습니다. 이 사건 직후에 교회에 큰 능력이 나타나기 시작하여 부흥이 일어납니다. 사람들이 치유되는 역사가 있었습니다. 교회가 순결해지고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거룩한 삶을 살게 될 때 교회가 영향력을 발휘하게 되고 주위에 좋은 간증을 남기고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오늘날 교회들은 영향력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거룩하고 순결하게 살면서 주위에서 예수 믿는 사람으로 인정받고 있는지 자신을 돌아보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교회를 깨끗하게 하셨습니다. 거룩하게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접하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피값으로 주고 산 교회 공동체를 파괴하는 죄 그것이 바로 거짓의 죄악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던져야 할 중요한 질문이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이 거짓을 극복하고 거룩한 교회공동체가 될 수 있습니까? 어떻게 교회내에 사단이 틈타지 못하게 이 거짓을 예방할 수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가 어떻게 능력있는 교회가 되고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질문에 대한 대답을 얻기 위해서 아나니아 삽비라 부부를 통해서 교훈을 얻게 됩니다.
2.아나니아와 삽비라를 통해 어떤 교훈을 받을 수 있을까요?
거짓을 극복하고 능력있는 교회 공동체가 되기 위해서는)
첫째, 하나님을 의식하는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1-6절)
우리가 거짓의 죄를 극복하고 능력있는 거룩한 공동체가 되려면 사람보다 하나님을 더 의식하는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왜 거짓말을 하게 되었습니까?
사람들에게 인정받으려는 것 때문에 거짓말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가 하나님만 의식했더라면 이 거짓을 범할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5장 1절 앞에 우리 성경에는 없습니다. [그러나]라는 접속사가 있습니다. 이것은 앞의 사건과 대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앞에 어떤 사건이 나옵니까? 나바나는 성령이 충만하여 자기의 재산을 팔아 사도들 앞에 드렸습니다. 그 다음에 나오는 사건이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사건입니다.
바나바는 성령이 충만하여 자기의 이기심을 극복하고 교회를 세우기 위해 자기의 모든 재산을 팔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그러나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자신의 재산을 팔아 많은 물질을 사도들의 발 앞에 드렸지만 그런 동기로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인정받으려는 욕심으로 누구보다도 헌신된 사람처럼 보이려고 하였다는 것입니다.
바나바가 성령이 충만하여 헌신하였다면 그러나 아나이아와 삽비라는 사단이 그 마음에 가득하여 하였다는 것을 대조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동기가 하나님 중심이 아니라 사람중심이었다는 것입니다.
2-3절 말씀입니다.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매 그 아내도 알더라 얼마를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 베드로가 가로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어떤 부부입니까? 그들은 부유할 뿐 아니라 헌신된 사람이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체면이나 형식으로라도 자기 집이나 땅을 팔아서 헌금할 정도면 믿음이 대단한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교회일을 위해 자신의 땅이나 집을 팔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쉬운 일이 결코 아닙니다. 우리 성도들 중에 교회 건물을 짓는다고 집 팔 사람이 있을까요? 헌금하자고 그러면 자기 땅을 내놓을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요?
한 번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해 보십시오 자신의 모든 재산을 팔아 얼마는 감추었지만 사도들 발앞에 내 놓았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그렇게 쉽게보면 안됩니다. 그러나 이들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나의 헌신을 어떻게 보느냐가 아니라 사람들이 어떻게 보느냐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이 부분에서 실수를 합니다. 열심도 있고, 헌신도 하고, 희생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보다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보느냐에 관심이 더 많은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보고 신앙생활을 합니까? 아니면 사람을 보고 신앙 생활을 합니까? 우리는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면서 상처를 많이 받습니다. 왜 상처를 받습니까? 사람을 보기 때문입니다. 사람 때문에 시험드는 것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왜 거짓말을 하였습니까?
하나님보다 사람을 의식하였기 때문입니다.
누가 하나님보다 사람을 의식하도록 유혹합니까? 사단입니다. “어찌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얼마를 감추었느냐”
마태복음 6:1절에서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
대부분의 경우 저와 여러분이 거짓 말을 하게 될 경우에 가만히 분석해 보세요. 왜 그렇습니까? 사람을 의식하기 때문에 거짓말을 하게 됩니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자기 위신 때문에 나를 방어하기 위해서 아니면 자기 체면을 세우기 위해서 거짓말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의식할 때 정직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식할 때 바른 동기로 하나님을 섬길 수가 있는 것입니다. 당신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을 의식하는 그리스도입니까? 사람을 의식하는 그리스도입니까?
요셉이 보디발 장군의 아내로부터 유혹을 받았을 때 이런 고백을 합니다. 창세기39:9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하리이까” 우리가 하나님을 의식하면서 살면 거룩한 삶을 살게 됩니다.
거룩함이 능력있는 그리스도인 되게 하고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능력있는 공동체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런 삶을 살 수 있습니까? 하나님을 의식할 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시고 그 중심을 취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헌금의 액수에 있는 것이 아니라 헌금하는 태도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과부의 두 렙돈을 기뻐받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거지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돈이 없으신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헌금하고 헌신하고 봉사하게 하는 것은 우리들을 축복하기 위함입니다.
교회는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만 있어도 되는 곳입니다. 교회는 돈을 가지고 운영하는 곳이 아닙니다. 교회는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를 가지고도 오천 명을 먹일 수 있는 기적을 만드는 곳입니다. 하나님은 돈의 양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돈을 대하는 태도에 관심이 있는 것입니다. 어떤 태도로 하나님께 봉사하느냐에 관심을 보이십니다. 하나님은 결코 속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의식하고 살아가는 거룩한 성도가 되고 교회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둘째, 하나님이 주시는 회복의 기회를 붙잡아야 합니다.(3,7-11)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과 찬양을 돌리는 태도로 살아갑니다. 그러나 항상 그렇게 살지 못하는게 우리 인간입니다.
사람을 의식하며 신앙생활을 할 때가 있습니다. 실수할 때가 있습니다. 실패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나를 바르게 신앙생활 할 수 있도록 그 때마다 책망하십니다. 그리고 회개하여 회복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십니다. 그 때 하나님이 주시는 회복의 기회를 붙잡을 때 계속해서 우리가 거룩한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거룩한 성도가 되고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주시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붙잡아야 합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죽게 된 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회복의 기회를 놓쳤기 때문입니다. 3절 말씀입니다.
“베드로가 가로되 성령충만하여 베드로가 아나니아 삽비라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이때 아나니아가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였더라면 얼마나 달라졌을까요? 그러나 아나니아는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놓쳤습니다.
그 다음에 삽비라의 경우 아내의 경우를 보십시오. 7-8절 말씀입니다.
“남편이 죽고 세 시간쯤 지나 그 아내가 그 생긴 일을 알지 못하고 들어오니 베드로가 가로되 그 땅 판 값이 이것 뿐이냐(이것이 전부냐) 내게 말하라”
(이것이 전부더냐) 이것이 기회였습니다. 그런데 묵살해버리고 양심의 음성을, 그리고 성령의 음성을 묵살하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 이것이 전붑니다. 그리고 모든 상황은 끝났어요. 그것이 비극의 마지막 종말이었습니다.
회개의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회복의 기회를 주실 때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붙잡아야 합니다.
성경은 계속적으로 강조 합니다. 성령을 속이지 말라, 성령을 소멸하지 말라!
그렇습니다. 성령이 역사하실 때 나의 마음의 죄를 밝혀주실 때 그 때가 회복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 마음속에 숨겨져 있는 깊은 것까지 감찰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성령이 내 자신의 잘못을 깨닫게 해 주실 때 기회를 놓치지 말고 붙잡아 거룩을 회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요나는 큰 고기 뱃속에서 회개하여 기회를 붙잡았습니다.
베드로는 밖에 나가 심히 통곡하였다.
다윗은 나단 선지자가 죄를 책망하였을 때 “내가 바로 그 죄인입니다.”라고 자신의 죄를 시인하고 눈물로 침상이 섞기까지 회개하여 거룩한 삶을 회복하였습니다. 그리고 난 후 시편32편에서 고백하기를 “죄의 사함을 받은 사람이 복있는 자”라고 하였습니다. 회개하지 않았을 때는 뼈가 마르는 것같은 고통을 느꼈다고 고백하였던 그가 회개하고 난 후 가장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거룩한 삶을 살 때 능력이 있습니다. 가면을 벗고 진실된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오십시오.
회개는 인간의 가장 소중한 행동이며 하나님이 또 다른 기회를 주시는 동기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5절에서 주님은 에베소교회를 책망하시기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오늘의 에베소는 폐허의 도시입니다. 고고학자들이 발굴해서 관광용 도시로만 남아 있습니다. 이 도시의 입구에는 사도행전의 역사를 기록했던 누가의 무덤만이 쓸쓸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화려했던 에베소가 페허의 도시로 전락해 버린 것입니다. 불행하게도 요한계시록의 경고가 응답되었습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네 촛대를 옮기리라.”
사랑하지 않는 공동체. 진리를 잃어버린 공동체, 거룩함을 상실한 공동체, 그런 공동체는 이미 주님의 사역을 감당할 자격을 잃어버린 공동체입니다. 주님은 다른 공동체를 찾기 시작합니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 찌어다.”
하나님은 교회가 거룩한 공동체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거룩한 공동체가 될 때 능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거짓이 유행하는, 거짓이 편만한 사회 속에 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만이라도 정직해야 되는데 오늘 우리의 체면, 우리의 위신 때문에 정직을 외면하고 살아갑니다. 하나님은 아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아십니다. 이제 그만 거짓을 포기하십시다. 가면을 벗고 진실된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섭시다. 그리고 새로워 지십시다. 그리고 거룩한 성도의 본래의 모습을 회복합시다. 그래서 이 마지막 시대에 마태복음 말씀처럼 우리를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며 우리 교회를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수 있는 거룩한 공동체가 될 수 있도록 합시다.
셋째, 거룩을 추구하는 동료가 되어야 합니다. (1-2,9절)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속이기를 서로 꾀하였습니다. 9절 말씀입니다.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어찌 함께 꾀하여 주의 영을 시험하려 하느냐”
거룩한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서는 서로가 거룩을 추구하는 동료가 되어야 합니다. 서로 정직을 격려할 수 있는 분위기가 되어야 합니다.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하는 것같이 사람이 그 친구의 얼굴을 빛나게 한다.”고 잠언 기자는 말합니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유익하게 하는 부부이며 또한 친구입니까? 아니면 우리는 함께 타락하고 있습니까?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의 최대의 비극 중의 하나는 서로가 서로를 충고할 수 있는 관계가 되지 못했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두 사람 중에서 만약 한 사람이라도 정직할 수 있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이 본문의 사건을 보면 재미있어요. 1절에 어떻게 시작됩니까?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그 아내 삽비라로 더불어 소유를 팔았습니다. 2절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었습니다. 아마 주도적으로 남편이 했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감춘 사실을 누가 알았습니까? 그 아내도 알았어요. 이때 아내가 “여보 우리 하나님 앞에 정직합시다.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잖아요.”그랬으면 얼마나 좋아요. 9절을 보십시오,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어찌 함께 꾀하여 주의 영을 시험하려 하느냐”
우리 하나님 앞에 정직합시다. 교회가 거룩한 분위기가 될 수 있도록 “정직합시다.” 우리가 서로에게 좋은 친구가 되어야 합니다. 도움이 될 수 있는 친구, 유익한 친구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거룩한 교회공동체를 만들어 가는데 함께 갈 수 있는 믿음의 친구가 된다는 것, 얼마나 중요한 일입니까? 우리가 서로에게 좋은 친구가 될 때 건강한 교회, 건전한 교회 거룩한 교회로 만들어 가게 되리라 믿습니다. 교회가 거룩할 때 능력이 있습니다.
다같이 에베소서4:25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니라.”
어떻게 거룩한 공동체로 만들어 갈 수 있습니까?
첫째, 하나님을 의식해야 합니다
둘째, 회복의 기회를 붙잡아야 합니다.
셋째, 서로 좋은 동료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가장 아름다운 교회를 세워서 주님의 일을 감당하는 능력 있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하기 위해서는 거룩한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 다같이 합력하여 거룩한 공동체로 만들어 갑시다. -아멘-
3.오늘 이 말씀을 공부하면서 느낀 점을 기록하여 보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