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회 공과 2012년 9 월 7 일

스데반이 순교하다.
사도행전7장54절~60절

사도 바울을 제사장 아나니아가 벨릭스 총독 앞에서 고소하며 우리가 본 바로는 이 자는 염병 같은 자요, 온 세계에 있는 모든 유대 사람에게 소란을 일으키는 자요, 나사렛 도당의 괴수입니다.(행 24:5) 라고 했습니다. 초대교회의 성도들이 그들이 사는 도시에 얼마나 강력한 영향을 끼쳤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1.죽음 앞에서 서있는 스데반 모습을 어떻게 설명 할 수 있을까요?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엡 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대를 본받으면 안됩니다. 사단은 이 세상의 풍속을 통하여 우리에게 온갖 악한 영향을 끼치려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오히려 이 세상에 영향을 끼치며 사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 세상을 뒤집어 놓을 큰 꿈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지옥과 같은 이 세상을 천국으로 변화시키며 사는 사람이 우리들입니다. 사도 바울을 제사장 아나니아가 벨릭스총독앞에서 고소하며 우리가 본 바로는 이 자는 염병 같은 자요, 온 세계에 있는 모든 유대 사람에게 소란을 일으키는 자요, 나사렛 도당의 괴수입니다.(행 24:5) 라고 했습니다. 초대교회의 성도들이 그들이 사는 도시에 얼마나 강력한 영향을 끼쳤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염병과 같이 강하게 세상에 영향을 주고 있습니까? 세상을 소요케하고 있습니까? 단 몇 사람만 있었어도 그로인해 온 도시가 시끄러웠는데 오늘 우리는 천 만이 넘는 그리스도인을 자랑하는데 무슨 영향을 나라와 민족에 우리가 살고 잇는 도시에 끼치며 살고 있습니까? 우리의 영향력이 약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 세대, 이세상의 사람들 꽁무니만 쫓아 다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따라가면 세상에 아무 영향도 끼칠 수가 없습니다.
어떤 유명한 목사님이 이런 기도를 하였다고 들었습니다. “주님 저에게 이 세상 이 세대의 물결을 따라 흐르지 않고 거슬러 올라가며 사는 사람 열 명만 주십시오. 그러면 제가 그들과 함께 주님께 만명을 돌려드리겠습니다.” 단 열 명만이라도 이세대의 조류를 거슬러 사는 사람만 있으면 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말슴입니다. 여러분중에 그렇게 살 사람이 몇 분이나 계십니까? 세상 사람이 다 돈을 하나님처럼 섬겨도 눈 하나 까딱하지 않으며 주님만 섬기며 사시겠습니까? 세상 사람이 쾌락만을 쫓으며 죄의 길을 따라 걸어도 단호하게 거기서 나와 유행을 거부하며 사시겠습니까? 세상 사람들이 모두 비웃어도 모두 비난해도 혼자만이라도 의의 길을 걸어가시겠습니까? ‘가난해도 좋다. 고생해도 좋다. 손가락질 당하고 비웃음거리가 되어도 좋다. 나는 오직 예수님이 걸어가신 그 길을 따라가겠다.’ 하는 결단이 여러분에게 있습니까?
예루살렘교회의 스데반은 아주 짧은 인생을 살다간 사람입니다. 스데반은 집사 안수를 받고서 일년도 사역하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 역사상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람중의 하나입니다. 스데반은 사도들도 하지 못한 큰 일을 이루었습니다. 완악하여 기독교를 박해하는 것을 사명으로 알고 큰 해를 입힌 사울이라는 청년을 회심시켜 기독교 역사상 가장 위대하게 쓰임 받게 한 인물이 바로 스데반이기 때문입니다. 스데반은 죽고 난 후에도 영향력이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럼 스데반은 어떻게 그런 강력한 능력을 보일 수 있었습니까? 그는 항상 성령이 충만한 삶을 살았습니다. 55절에 보면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성령이 충만하니까 강력한 영향력이 그에게서 뿜어져 나왔습니다. 성령충만하니까 죽어가면서까지 그의 원수까지도 변화시켰습니다. 스데반은 성령충만하니까 누가 뭐라고 해도 요동하지 않고 심지어 죽음앞에서도 조금도 두려워하지도 않고 흔들리지도 않습니다.

2.성령이 충만한 스데반을 설명하여 봅시다.

1) 성령 충만하면 영안이 활짝 열립니다. (55)

다른 사람은 보지 못하고 잇는데 스데반이 보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늘이 열린 것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의 오른편에 서신 것을 보았습니다. 성령충만하면 영안이 열리고 영적 세계를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은 전도 여행 중에 마게도냐 사람들이 손짓하며 부르는 것을 보았습니다. 3층 천국까지 보았습니다. 베드로는 성전 미문 앞에서 앉은뱅이에게 믿음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오늘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육안에 의해 세상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에 세상을 따라갑니다. 영안이 닫혀 있기 때문에 하늘을 바라보지 못합니다. 예수님이 일어서셨는지 앉으셨는지 알지 못합니다. 육에 속한 삶을 살기 때문에 영적인 세계에 대해 무지합니다. 믿음은 무엇입니까?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입니다. 믿음을 가지고 산다는 것은 육안에만 의지하여 살지 않고 또 다른 눈 즉 영적 안목을 가지고 세상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세계를 바라보며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예수님을 바라보고 살며 영원한 세계를 바라보며 살다보면 하늘 문이 열리는 것도 바라볼 수 있습니다.

2) 성령충만하면 용서가 쉽게 됩니다. (60)

사단에게 사로잡혀 잇는 사람은 미움과 원망으로 충만합니다. 살기가 등등합니다. 본문에서 사울과 따르는 사람들은 큰 소리를 지르며 일심으로 달려들어 성밖에 내치고 너 나 가릴것 없이 돌을 들어 쳤습니다. 죽이기로 결심하고 사람을 돌로 쳐서 목숨을 끊어놓았습니다.
그러나 스데반은 죽어 가면서까지 원망하지 않습니다. 복수심으로 불타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을 용서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서 죄값을 찾지 않으시도록 죽어가면서까지 돌을 던진 사람들을 예수님께 부탁하고 잇습니다. 진정한 용서가 무엇인지 몸으로 보여주고 죽었습니다.
요즘 현대인들은 감정의 상처를 많습니다. 그리고 보복심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누가 조금만 귀에 거슬리는 말을 하면 싸우려고 덤벼듭니다. 용서할줄을 모릅니다. 사소한 실수까지도 보복하려고 합니다. 미움과 원망, 증오등의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고 끌려 다닙니다. 사실은 그 감정 배후에서 사단이 역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은 겉보기에는 화려하나 실상은 심각합니다. 그리스도인들까지도 가장 심각한 것이 인간관계의 갈등입니다. 왜 그렇게 됩니까? 성령충만하지 못하니까 아무것도 아닌 것 가지고 서로 감정을 품습니다. 오해하고 미워하며 저주하고 눈을 흘깁니다. 그러나 스데반처럼 성령충만해지면 다 이해가 됩니다. 용서가 됩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합니까?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하나님이 풍성하게 주시니까 자기를 향하여 돌을 던지는 사람도 ‘쯔쯔 은혜를 모르니 저렇지 저러다 멸망당하면 얼마나 비참할까?’ 이런 마음이 드는 것입니다.

3) 성령충만하면 늘 기도가 나옵니다. (59)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도 스데반은 마지막 순간까지 기도를 합니다. 조용한 공간도 아닙니다. 기도할 분위기도 아닙니다. 몸은 돌에 맞아 으스러지고 피투성이가 된 상태에서 마귀처럼 일그러진 사람들이 지켜보는 상황에서 스데반은 간절히 부르짖습니다. 무엇을 간구합니까? 살려달라고 부르짖는 것이 아니고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대제사장도 사울도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지 주님께 한 번도 물어보지 않았습니다. 저들이 주를 위한 열심이었다면 먼저 기도해야 하는 것이 맞지 않습니까? 그러나 저들은 자기의 편협한 선입견으로 그리스도인들을 없애려고만 하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만약 진정으로 기도했다면 하나님께서 깨우쳐 주셨을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으니까 하나님을 향한 열심이라고 하면 하나님의 역사를 방해하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이런 사람들이 많습니다. 자신은 열심으로 하나님을 섬겼다고 하지만 하나님을 괴롭히고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하나님게서 얼마나 안타갑게 여기시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먼저 기도부터 해야 합니다. 그리고 기도하기 어려운 환경속에서도 힘서 기도해야 합니다. 그런데 사실 기도해야 한다는 것을 모르는 그리스도인은 없습니다. 기도해야 할 때임을 잘 압니다. 기도하라는 주님의 명령도 들었습니다. 기도하면 응답이 주어지고 문제가 해결됨을 알면서도 기도를 잘 못하는 이유는 성령으로 충만하지 않고 자기의 힘으로 살려고 하고 잇기 때문입니다.
성령충만한 사람이 되면 언제 어디서나 어떤 상황에서나 절로 기도가 나옵니다. 먼저 주님께 부르짖고 주님을 의지하려고 합니다. 하나님과 만나는 것이 자연스럽고 쉽습니다. 기도하니까 천사처럼 변합니다. 기도하니까 용서도 절로 됩니다. 기도하니까 영안이 열려서 세상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세계를 보며 삽니다. 기도하니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세상에 강력한 영향을 끼치며 살게 됩니다.

모노 뉴클레오시스란 병이 있습니다. 피에 단핵을 가지고 있는 세포들이 많아지는 전염병입니다. 이 병에 걸린 사람과 건강한 사람이 입맞춤을 하면 환자가 건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건강한 사람이 그 병에 걸리게 됩니다. 모든 병이 다 마찬가지입니다. 건강한 사람이 감기에 걸린 사람과 있으면 건강한 사람으로 인해 감기에 걸린 사람이 건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건강한 사람이 감기에 걸립니다.
올바른 소수가 잘못된 다수에게 영향을 주지 못하며 바른 사상이 잘못된 사상을 바꾸기가 힘듭니다. 좋은 말 열 마디보다 나쁜 말 한 마디가 더 힘이 있습니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악한 사람보다 몇 십 배 몇 백 배 더 건강해야 하고 영적 기운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악한 세상을 구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 어두운 세상에 빛의 영향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부패한 세상에 소금의 영향을 끼쳐야 합니다. 문제 많은 세상에 불행한 세상에 행복을 확산시켜야 합니다. 우리의 능력이 아닌 성령 충만 함으로 위로부터 부어진 강력한 능력으로 큰 영향을 끼쳐야 합니다.

3.내가 스데반을 본받으려면 어떤 결심을 해야 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