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회 공과 2012년 10월 13일

베드로가 중풍병자와 도르가를 살리다.
사도행전9장32절~43절

사도 베드로의 순방

사도행전 전반부, 1장에서 12장까지의 중심인물은 베드로입니다. 베드로의 활동은 1장에서 시작하여 8장 25절 이후부터 9장 31절까지 잠깐 기록이 중단 되었다가 다시 32절부터 재개됩니다. 8장에서 베드로 사도는 사마리아도 복음을 받았다는 소식을 듣고 요한과 함께 사마리아로 가서 여러 고을에서 복음을 전하고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간 바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베드로 사도는 사방으로 두루 다녔다고 합니다. 주로 유대 지역을 순회 했는데, 아마 예루살렘에서 박해를 받고 흩어진 그리스도인들을 찾아 순방한 것 같습니다. 농부가 밭에 곡식을 심어 놓고 수시로 돌아보듯이 목자는 양떼를 찾아 수시로 돌아보는 것이 책임입니다. 언제 마귀가 가라지를 뿌려 놓을 는지,(눅11:24,마13:25) 혹은 언제 늑대가 양을 물어갈는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순회한 지역은 룻다, 욥바, 가이샤라 지역입니다. 룻다에서는 애니아 사건이 있었고, 욥바에서는 도르가를 살린 기적을 행했고, 가이사랴에서는 고넬료 가정을 구원하는 사건이 이어집니다.
오늘 말씀의 사건은 룻다에서 일어났습니다. 룻다는 구약 성경에 나오는 롯과 같은 말입니다. 현대에도 롯이란 마을이 있는데, 욥바 동남쪽 16km 지점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헬라인들은 룻다를 Diospolis 라 불렀는데, 로마의 신 쥬피터의 신전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도 시대 당시 룻다는 혈통적으로 사마리아처럼 절반의 유대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의 관점에서 보면 헬라적이며 이교적입니다. 성경에 보면 베드로가 방문한 대상을 “룻다에 사는 성도들”이라고 했습니다. “성도”라는 말을 사용한 것은 그들이 비록 혈통적으로 절반의 유대인이라 해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거룩해진 사람들임을 인정했다는 뜻입니다. 룻다에 언제부터 성도들이 있었을까? 두 가지 추측이 가능합니다. 첫째는 예루살렘에서 박해를 피하여 이주해 온 사람들입니다. 둘째는 빌립 집사의 전도입니다. 사도행전 8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빌립은 아소도(아스돗)에 나타나 여러 성을 지나 다니며 복음을 전하고 가이사랴에 이르니라”(행 8:40) 빌립은 아소도(구약의 아스돗)에서 가이사랴에 이르는 지역을 통과하면서 복음을 전했고, 그 결과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룻다, 욥바, 가이사랴 지역은 행정구역으로 유대에 속합니다. 사도행전 1장 8절에 성령이 임하시면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증인이 된다고 했는데, 베드로 사도에 의해서 복음은 예언대로 땅 끝을 향하여 진행되고 있습니다.

1.애니아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를 낫게 하시니 일어나 네 자리를 정돈하라”는 베드로의 말은 무엇을 의미하며 병 나음으로 그의 둘레에 어떤 변화가 일어났습니까?

애니아야! 일어나 제 자리를 정돈하라

룻다에서 베드로가 행한 기적의 대상은 애니아(Aijneva”)입니다. 우리가 듣기에는 어감상 여성적인 이름인데 실제로는 남자입니다. 헬라식 이름인데 어원은 불분명 합니다. 사전에 찾아보니까 가장 비슷한 말은 “aijnevw”(아이네오)인데 찬양한다는 뜻입니다. 어느 신을 찬양하던 사람인지 모르겠습니다. 그가 신자인지 불신자인지는 명확치 않습니다. 정황으로 볼 때에 불신자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다만 베드로 사도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를 치료 하신다”고 한 것을 보면, 그가 예수 이름을 알고 있었을 가능성은 있습니다.
만일 그가 신자라고 해도 별 차이는 없습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해서 병들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 믿는다고 해서 육신의 모든 병이 즉시 낫는 것도 아닙니다. 나사로의 경우를 보면 예수 믿는 가운데 병들었습니다. 신자가 병든다면 이유가 있겠지요? 특별한 연단이거나, 아니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시기 위함입니다. 주님은 사랑하시는 나사로가 병든 것을 아셨습니다. 아시면서도 그냥 놔두셔서 결국은 죽게 되었습니다. 주님은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들으시면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라”(요11:4) 오늘 예수 믿는 가운데 병든 분이 계십니까? 주님이 아십니다. 다만, 내 병을 통해서 주님께서 영광을 어떻게 나타내시는지 인내하면서 기다리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육신의 병을 고쳐 주실 때에도 순서가 있습니다. 무조건 육신의 병부터 고쳐주시지는 않으십니다. 먼저 영혼의 병부터 고쳐주십니다. 마태복음 9장에 보면 주님은 중풍병자에게 먼저 죄 사함의 은혜를 주셨습니다. 영혼 구원이 먼저입니다. 먼저 죄 용서를 받고 하나님 자녀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 중에 병든 사람이 있습니까? 먼저 영혼의 치료부터 받으시기 바랍니다. 먼저 내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큰 죄인인지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의지하세요. “주여 나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섬기지 못한 죄인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한 죄인입니다. 이제 회개합니다. 주님을 영접합니다. 주여 내 마음에 오셔서 내 죄를 씻어 주시고, 나를 하나님 자녀로 받아 주소서!” 주님은 나를 용서하십니다. 모든 죄를 씻어주십니다. 아무 죄도 없었던 것처럼, 내 영혼을 깨끗하게 씻어 주십니다. 할렐루야!
간혹 육신의 병부터 먼저 고쳐주시는 경우도 없지 않습니다. 누가복음 17장에 보면 열 명의 나환자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님이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실 때에 열 명의 나환자들이 다가왔습니다.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눅17:13) 선생님이라고 번역한 말은 “ejpistavth””(에피스타테스) 즉, 감독님이란 뜻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잘 몰랐습니다. 예수님이 병자들을 고쳐주신다는 말만 듣고 멀찍이 서서 소리친 겁니다. 예수님은 이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눅17:14) 가는 길에 다 고침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한 명만 예수님께 되돌아 왔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알고 영광을 돌리러 왔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눅17:19) 육신만 치료받고 영혼 구원을 받지 못한다면 불행한 일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바로 베드로의 명령입니다. “베드로가 이르되 애니아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를 낫게 하시니 일어나 네 자리를 정돈하라”(34) (Aeneas, Jesus Christ heals you; arise, and make your bed.) 이 부분에는 아주 중요한 메시지가 들어 있습니다.

첫째로, 치료하시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시라는 사실입니다.

베드로는 내가 너를 치료한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너를 치료하신다고 했습니다. 오늘 우리 병을 고치시는 분은 목사도 아니고 신유 은사를 가진 권사도 아닙니다. 오직 예수님이 나를 치료하십니다.

둘째로, 치료에 대한 베드로 사도의 확신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주님이 너를 치료하실 것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ija’taiv se”(heals you!) 주님이 너를 치료하신다! 미래형이 아니라 현재형입니다. 확정적으로 선언합니다. 이 성경 말씀에 대해서 어떤 주석가는 두 가지 평가를 했습니다. 첫째는 베드로의 겸손이고, 둘째는 베드로의 믿음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주님이 치료하심을 믿고 확신했습니다. 오늘 주님이 내 병을 치료하신다. 라고 선포 한 것입니다.

셋째로, 일어나 네 자리를 정돈하라는 명령입니다. (arise, and make your (bed))

직역하면 “일어나라! 네 것을 정돈하라!”는 뜻입니다. 이 말의 뜻은 포괄적입니다. 단순히 중풍병에서 일어나라는 말이 아닙니다. 일어나서 당신 스스로 당신 것을 정돈하시오! 예를 들면 애니아가 누워 있던 침상을 정돈할 뿐 아니라, 그가 하던 직업적인 일을 다시 하고, 가사를 돌아보고, 이웃에게 할 일을 하라는 겁니다. 손님들이 와 있으니 대접하는 일을 하시오! 그런 의미의 말입니다. 누구든지 병들면 자기가 맡은 책임을 감당치 못합니다. 가족에게나 이웃에게는 물론 내 스스로에게 해야 할 일도 감당치 못합니다. 심하면 식사도 못하고, 화장실도 못 다닙니다. 이런 처지에서 이제는 내가 할 일을 하는 사람이 되라는 뜻입니다. 오늘 심각한 병이 든 분이 있습니까? 혹시 가족 중에 이런 환자가 있습니까? 오늘 위해서 기도합시다. 주여 내 병을 고쳐 주소서! 주여 내 가족의 병을 고쳐 주소서! 일어나 자리를 정돈하게 하소서! 자기 일을 하게 하소서! 오 주여, 지금 치료해 주소서!
베드로 사도가 명령할 때에 애니아의 병은 즉시 나았습니다. “곧 일어나니”(And immediately he arose.) 무려 8년 동안 누워 있었습니다. 중풍병은 난치병입니다. 잘 고쳐지지도 않고, 치료가 더딥니다. 그런 환자가 즉시 침상에서 일어났습니다. 그에게 기쁨일 뿐만 아니라 가족들에게 말할 수 없는 기쁨입니다. 긴 병 든 이 효자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오래 앓아 누우면 가족들도 힘듭니다. 8년 동안 병자를 돌아보느라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그 모든 수고가 단번에 해소되었습니다. 할렐루야! 오늘 이런 치료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기를 기도합시다.

사론 지역 사람들의 회심

마지막으로 이 사건의 결과, 즉 지역적인 회심의 역사입니다. 애니아가 고침 받았을 때 따라서 회개한 사람은 한 사람이 아닙니다. 가족만도 아닙니다. 사론 지역 안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돌이켰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의도하신 결과입니다. 한 사람이 중풍병에서 벗어나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그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들이 복음을 받는 것이 목적입니다. 오늘 우리 가운데 신유의 역사가 있습니까? 한 사람의 병 고침으로 끝나지 않고, 온 가족, 가문, 나아가서 지역 사회가 구원 받는 계기가 되기 바랍니다.
사론은 도시 이름이 아니라 지역의 이름입니다. 갈멜산 남쪽 해변을 따라, 가이사라, 욥바, 룻다가 속한 지역이 바로 사론입니다. 사론은 구약 시대 기름지고 아름다운 땅의 대명사입니다. 땅이 좋으니까 목축, 곡식, 과일이 다 풍부하게 잘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풍성한 축복을 사론의 아름다움으로 표현합니다. “광야와 메마른 땅이 기뻐하며 사막이 백합화같이 피어 즐거워하며, 무성하게 피어 기쁜 노래로 즐거워하며 레바논의 영광과 갈멜과 사론의 아름다움을 얻을 것이라 그것들이 여호와의 영광 곧 우리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리로다.”(사35:1-2)
사론 지역 사람들이 회개한 것은 의미가 있습니다. 사론은 아름다운 땅의 대명사입니다. 그러나 그 땅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할 때는 땅의 아름다움이 무색했습니다. 영적으로 보면 어둡고 죽어 있는 지역에 불과합니다. 그런 땅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 명실상부하게 아름다운 땅이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이런 변화가 일어나기 바랍니다. 우리는 온갖 좋은 이름들을 갖고 있습니다. 개인의 이름에서부터, 마을 이름, 지역 명칭, 상호, 상표에 이르기까지 아름다운 이름은 다 갖다 붙였습니다. 특히 요즘 아파트 이름을 보면 휘황찬란합니다. 왕궁 같은 집이라고 “PALACE”란 이름을 붙였습니다. 중세의 성 같은 집이라고 “CASTLE”이란 이름을 붙였습니다. 별장 같은 집이라고 “VILLA”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이름만 아름다우면 뭐합니까? 영적으로 사막인데! 팰리스에 살면서 가족은 콩가루라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영혼이 잘 되어야 진정 아름다운 땅이 되고, 진정 아름다운 장막이 됩니다.
사론 지역 사람들은 주께로 돌아왔습니다. (turned to the Lord.) 돌이킨다는 말은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올 때에 사용하는 말입니다. 이런 표현은 예수님께 사용한 것은 곧 예수님이 곧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인정했습니다. 예수님을 메시아 곧 구주로 인정하고 영접했습니다. 오늘 나 한 사람이 은혜 받을 때에 가족이 돌이키게 됩니다. 나 한 사람이 병 고침을 받을 때에 주변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이 구주이심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이 과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인정하게 됩니다. 나로 말미암는 집단적인 돌이킴의 역사가 내 주변에서 일어나게 되기를 기원합니다.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다한 사람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행11:21)

2. 다비다가 죽자 믿음 사람들이 취한 행동과 베드로가 와서 취한 행동을
살펴봅시다.

욥바에 다비다라 하는 여 제자가 있으니 그 이름을 번역하면 도르가라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더니, 그 때에 병들어 죽으매 시체를 씻어 다락에 누이니라.(36-37) 룻다가 욥바에서 가까운지라 제자들이 베드로가 거기 있음을 듣고 두 사람을 보내어 지체 말고 와 달라고 간청하여,(38) 베드로가 일어나 저희와 함께 가서 이르매 그들이 데리고 다락방에 올라가니 모든 과부가 베드로 곁에 서서 울며 도르가가 저희와 함께 있을 때에 지은 속옷과 겉옷을 다 내어 보이거늘, 베드로가 사람을 다 내어 보내고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돌이켜 시체를 향하여 이르되 다비다야 일어나라 하니 그가 눈을 떠 베드로를 보고 일어나 앉는지라. 베드로가 손을 내밀어 일으키고 성도들과 과부들을 불러들여 그가 살아난 것을 보이니(39-41), 온 욥바 사람이 알고 많은 사람이 주를 믿더라. 베드로가 욥바에 여러 날 있어 시몬이라 하는 무두장이의 집에서 머무니라. (행9:42-43)
다비다

오는 성경은 베드로의 사론 지역 순방의 두 번째 사건입니다. 장소는 욥바이고 주인공은 다비다입니다. “욥바에 다비다라 하는 여 제자가 있으니 그 이름을 번역하면 도르가라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더니”(36) 다비다(Tabiqav)는 히브리식 표현이고, 도르가(Dorkav”)는 헬라식 표현입니다. 단어의 뜻은 영양(gazelle)이란 뜻입니다. 영양은 노루처럼 생긴 날씬한 짐승입니다. 몸이 우아하고 섬세하며 눈이 아름답습니다. 그래서 여성의 이름에 많이 붙이는 이름입니다. 다비다는 외모보다 행적이 아름다운 여인입니다. 성경에 보면 다비다에 대해서 두 가지 특징적인 언급을 합니다.

첫째는 “여 제자”(maqhvtria)란 칭호입니다.

교인을 가리키는 칭호가 많습니다. 교인, 성도, 신자, 그리스도인 등등. 교인이란 칭호는 교회에 속한 사람, 교회에 다니는 사람 정도의 칭호입니다. 신자라는 칭호는 믿는 사람이란 뜻입니다. 성도라는 칭호는 거룩한 추종자란 뜻입니다. 주로 천국 시민을 가리킬 때 쓰는 말입니다. 제자라는 칭호는 스승을 따르는 사람이란 뜻입니다. 예수님의 사상과 삶을 가장 충실하게 따르는 사람이 바로 제자입니다. 다비다는 여성으로서 제자란 칭호를 받았습니다. 일반적으로 교회에서 지도자나 가르치는 역할은 남성이 담당했습니다. “여자는 일절 순종함으로 종용히 배우라.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노니 오직 종용할지니라.”(딤전2:11-12) 그러나 여성으로서 제자는 많았습니다. 주님의 십자가까지 가장 가까이 따르고 머물렀던 사람들은 여성들입니다. 주님의 무덤에 가장 먼저 달려간 것도 여성이고, 부활을 가장 먼저 목격한 것도 여성입니다. 오늘날 교회의 절대 다수 구성원도 여성입니다. 아마 다비다 같은 여성에서부터 최초의 여집사가 세워지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둘째는 다비다의 선행과 구제입니다.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더니,” 다비다는 남편과 일찍 사별한 과부로 생각됩니다. 그러나 그는 우울하게 지내거나 허송세월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삶에 적극적이며 능동적이고 활동적이었습니다. 선행과 구제는 참 그리스도인의 표지입니다. 다비다의 선행은 생시보다 오히려 죽은 후에 더 많이 드러났습니다. 평소 나팔을 불지는 않았지만 주변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진정한 구제였습니다.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이는 것이니 그 선행을 갚아 주시리라”(잠19:17)
다비다의 구제에서 돋보이는 것은 그의 자비량 구제입니다. 요즘 자선단체도 많지만 주로 남의 돈을 가지고 구제하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진정한 자선은 자기 것을 나누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선을 행하기 위해 부자 되려는 사람이 진정한 부자입니다. 다비다는 친히 옷을 만들어서 구제에 사용했습니다. “도르가가 저희와 함께 있을 때에 지은 속옷과 겉옷을 다 내어 보이거늘,”(39) 옷 만드는 재주가 있다고 다 남을 위해 옷을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다비다의 선한 마음이 그의 재능을 빛나게 했습니다. 자선을 위해 자기 손으로 수고하는 봉사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도적질하는 자는 다시 도적질하지 말고 돌이켜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엡4:28)
이 성경말씀의 사건은 다비다의 죽음에서 시작됩니다. “그 때에 병들어 죽으매 시체를 씻어 다락에 누이니라.”(37) 다비다가 왜 병이 들었는지, 무슨 병이 들었는지, 혹은 어떻게 죽게 되었는지 설명이 없습니다. 아마 다비다의 죽음은 예상치 않은 것이었던 것 같습니다. 보통 유대인의 장례법에는 죽은 당일 장사하도록 되어 있었고, 사정이 있는 경우 사흘까지 허락되었습니다. 다비다는 시신을 묶지도 않았고 그냥 다락에 놔 둔 것을 보면 그의 죽음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들이 반영된 것 같습니다. 아무튼 이러한 다비다의 죽음이 어떤 결과를 초래했을까요? 바로 그 점이 본문의 관심사입니다.

다비다 주변의 사람들

다음으로 관찰할 것은 다비다와 함께 했던 주변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이들은 다비다의 죽음을 함께 슬퍼했습니다. 다비다 주변의 사람들은 두 종류입니다. 첫째는 다비다와 함께 한 성도들, 즉 교회 공동체 원들입니다. 둘째는 다비다의 도움을 받았던 과부들, 동료들입니다. 이 과부들 중에는 신자도 있고 불신자도 있었을 겁니다. 이들은 다비다가 평소 만들었던 옷을 입고 있기도 했고, 혹은 남겨 놓은 옷들을 보여주며 슬퍼했습니다. “모든 과부가 베드로 곁에 서서 울며 도르가가 저희와 함께 있을 때에 지은 속옷과 겉옷을 다 내어 보이거늘”(39) 성도들의 장례는 두 가지 면에서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는 슬픔을 당한 가족들과 함께 슬퍼하는 위로적 차원의 의미입니다. 둘째는 부활을 내다보게 하고 소망을 주기 위한 신앙적 의미입니다. 다비다 주변의 사람들은 두 가지 조치를 취했습니다.

첫째로, 다비다의 시신 정돈입니다.

“시체를 씻어 다락에 누이니라.”(37) 시신을 깨끗하게 씻는 것은 동서양의 풍속입니다. 유대인의 풍속이나 중동 지방의 풍속, 동양의 풍속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비다의 경우 특별한 것은 시신을 더 이상 처리하지 않고 다락에 안치한 것입니다. 대개 무덤에 장사지내기 위해서는 나사로처럼 시신을 천으로 싸거나 동여매는 절차가 필요한데 다비다는 평상복 차림으로 놔뒀습니다. 이것은 유대인의 계율보다는 뭔가 새로운 그리스도인의 절차를 밟기 위한 것으로 생각 됩니다.

둘째로, 베드로 사도를 청했습니다.

“룻다가 욥바에서 가까운지라 제자들이 베드로가 거기 있음을 듣고 두 사람을 보내어 지체 말고 와 달라고 간청하여,”(38) 성도들이 중심이 되어 베드로 사도를 청했습니다. 이들은 베드로가 룻다에 머물고 있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애니아의 중풍병을 고친 소식도 들어서 알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두 사람을 베드로 사도에게 보냈습니다. 급히 와 달라는 전갈과 함께. 그러면 왜 베드로 사도를 청했을까요? 과연 이들은 다비다의 부활 소생을 기대하고 있었을까요? 그런 기대는 하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이제까지 사도가 누구를 살린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들의 믿음이 거기까지 이르렀다고 보기는 힘듭니다. 그러면 왜 사도를 초청했을까요? 이들이 원한 것은 사도의 위로였습니다. 특히 다비다 같이 착하고 선한 일에 열성적인 사람이 갑자기 죽었을 때 어떤 해석이 필요합니다. 왜 하나님은 악하고 남에게 피해만 주는 사람은 살려두시고, 꼭 필요한 사람을 데려가실까요? 사랑하는 성도의 죽음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전해 듣고 싶었습니다. 유가족을 위로하는 것은 물론, 온 성도들을 위로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목회자로부터 하나님 말씀을 듣는 일! 그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오늘 내 삶에서 목사님은 어떤 위치에 있습니까? 삶의 결정적인 순간마다 목사님이 여러분 곁에 있습니까? 결혼에, 장례에, 특별한 행사에, 주의 종을 부르셨습니까? 다비다가 속한 교인들은 베드로 사도를 부르는 것을 최우선 순위에 두었습니다. 가장 먼저 주의 종을 청한 것! 그것이 다비다가 속한 욥바 교인들이 행한 가장 잘 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말씀만 듣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과 복이 그 말씀과 함께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사도가 기도하고 명령하다

그러면 베드로 사도가 나타나서 한 일이 뭡니까?

첫 번째로 한 일은 기도하는 일입니다.

사도나 평신도나 해결책은 기도뿐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모든 인생 문제의 해답은 기도에서 나옵니다. 귀신 들려 병든 환자를 고치신 후에 주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막9:29) 사도행전은 성령행전이라고도 합니다. 제가 보기에 사도행전은 기도행전이기도 합니다. 사도행전의 모든 중요한 순간들이 기도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맛디아 사도를 뽑는 일(1장), 초대 교회 성도들의 일과(2장), 오순절 성령 강림(2장), 일곱 집사를 세울 때(6장), 사마리아 성도들이 성령 받을 때(8장), 회심한 사울이 한 일(9장), 고넬료의 행적(10장), 베드로 사도의 일상(10장), 베드로 사도가 투옥되었을 때(12장), 안디옥 교회가 최초로 선교사를 보낼 때(13장), 빌립보 성에서 귀신을 쫓아 낼 때(16장), 빌립보 감옥에서 간수장 가족을 구원할 때(16장) 등등, 모든 일이 기도에서 비롯됩니다.
기도와 관련하여 본문에서 주목할 부분이 있습니다. “베드로가 사람을 다 내어 보내고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40) 베드로 사도가 주위 사람들을 다 다락방에서 내보낸 일입니다. 기도하는 근처에 아무도 오지 못하게 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오직 하나님과만 대면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 만나는 자리에 구경꾼이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나와 하나님과만 만나는 자리에 가족이나 친지조차도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도 야이로의 딸을 살리실 때에 그렇게 하셨습니다.(막5:30) 엘리야가 사르밧 과부의 아들을 살릴 때에도 그렇게 했습니다.(왕상17:23) 기도와 관련한 또 한 가지는 무릎을 꿇는 일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경배하는 마음으로 기도합니다. 무엇이나 맡겨 놓은 것처럼 요구할 일이 아닙니다. 특히 죽은 사람의 생명을 되돌리는 일에 있어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생명은 순전히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하나님만이 생명을 창조하셨고, 하나님만이 생명을 가져가시고, 하나님만이 생명을 되돌려 주십니다. 그러므로 겸손하게 무릎 꿇어야 합니다.

둘째로 한 일은 시체를 향하여 명령한 일입니다.

다비다야 일어나라! “돌이켜 시체를 향하여 이르되 다비다야 일어나라 하니”(40) 예수님께서 회당장 야이로의 딸에게 하신 말씀, “소녀야 일어나라!”(달리다굼) 하신 것을 베드로 사도가 흉내 냈을까요? 주님은 자신의 권세로 귀신을 쫓아내고 병자를 고치셨습니다. 그러나 사도는 그런 능력이 없습니다. 오늘 누구도 죽은 시체를 향해 이런 명령을 내릴 수 없습니다. 그러면 베드로 사도는 무슨 뜻에서 이런 명령을 했을까요? 주석가들은 두 가지를 언급합니다. 첫째는 베드로 사도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입니다. 베드로는 간절히 기도했고 주님은 어떤 형태로든지 베드로 사도에게 다비다를 살리라는 명령을 받았을 겁니다. 그러니까 베드로는 확신을 가지고 시체에게 명령을 한 것입니다. 둘째는 사도적 증표로써의 기적을 행하는 능력입니다. 당시는 신약성경이 기록되기 전입니다. 복음의 도리나 교리를 몰랐습니다. 누가 진정한 사도인지도 잘 몰랐습니다. 오늘날처럼 베드로 사도의 얼굴이 텔레비전 화면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알려지는 시대가 아니었습니다. 베드로의 이름을 아는 사람도 별로 없었고, 안다고 해도 이름만 알 뿐입니다. 가짜 베드로가 돌아다녀도 진짜와 구별할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도들에게만 특별한 권세를 주셨습니다. 바로 기적을 행하는 능력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런 능력을 사용하여 다비다를 살렸을 거라는 얘깁니다.
베드로가 명령하자 즉시 반응이 나타났습니다. 사도행전을 쓴 사람은 누가입니다. 누가는 의사입니다. 그래서 환자가 치유되는 모습을 상세히 기록했습니다. 본문에도 보면 다비다가 살아나는 과정이 몇 단계로 나타납니다. “그가 눈을 떠 베드로를 보고 일어나 앉는지라. 베드로가 손을 내밀어 일으키고 성도들과 과부들을 불러들여 그가 살아난 것을 보이니”(40-41) 첫째로 눈을 떴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를 바라보았습니다. 둘째로 일어나 앉았습니다. 셋째로 베드로가 손을 내밀어 일으켰습니다. 넷째로 완전히 소생된 것을 확인하고 사람들을 불러들여 보게 했습니다. 욥바의 교인들, 다비다 주변의 불신자들까지 죽은 사람이 살아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것은 그들 생애에 금시초문의 일입니다. 예수님은 사망을 이기는 권세를 가지셨다! 예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신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복음입니다.
앞서서 애니아가 중풍병에서 일어나는 장면을 보셨지요? 애니아의 치유는 예수 안에서 죄에서 해방되는 모습을 보여줬습니다. 예수님은 죄에서 풀어주시는 분입니다. 정죄와 심판, 형벌에서 벗어나게 하시는 분입니다. 이제 죄에서 해방되는 단계에서 나아가 죽음을 이기는 단계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예수님은 사망을 이기게 하시는 분입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을 믿은 최종 결과입니다. 오늘 우리는 사망을 이기는 권세를 갖고 있습니다. 부활 능력이 우리 속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죽음에 매여 종노릇 하지 마세요. 죽음을 과도하게 두려워하지 마세요. 우리는 이미 죽음을 이긴 사람들입니다. 생명의 주인이신 예수님이 우리 안에 계십니다. 죽음을 이긴 사람답게 담대하고 용기 있게 사시기 바랍니다.

욥바에 복음이 전파되다

마지막으로 말씀드릴 것은 욥바에 복음이 전파된 일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욥바, 룻다, 가이사라 지역은 헬라 문화 속의 도시들입니다. 혈통은 반 유대인이요, 종교는 이교적입니다. 땅은 유대 땅이지만 예루살렘과는 분위기가 사뭇 다릅니다. 사도행전 초반에 복음이 예루살렘, 온 유대, 사마리아, 땅 끝까지 이른다고 했습니다. 그 말씀처럼 복음이 예루살렘에서 절반의 유대인인 사마리아로 전파되었습니다. 그리고 문화적으로 이교적인 욥바와 가이사라로 퍼져 나갑니다. 말하자면 욥바는 이방으로 복음이 수출되는 출발점이 된 것입니다. “온 욥바 사람이 알고 많은 사람이 주를 믿더라. 베드로가 욥바에 여러 날 있어 시몬이라 하는 무두장이의 집에서 머무니라.”(행9:42-43)
욥바에 대해서 좀 더 설명을 드려야 하겠습니다. 욥바의 현재의 이름은 japha, jaffa, yafa 등으로 불립니다. 위치적으로 욥바는 가이사라 남쪽 약 30마일 48km 지점, 예루살렘에서 서북쪽으로 약60km 지점에 있습니다. 욥바는 사도 시대 당시 예루살렘에서 바다를 통해 이방으로 향하는 관문이었습니다. 역사적으로 욥바는 계속 그런 역할을 해 왔습니다. 솔로몬 시대에는 두로와 시돈에서 목재를 운반하는 항구였습니다. 왕국 시대, 에스라 시대에도 욥바는 중요한 항구였습니다. 요나가 스페인으로 가는 배를 탄 곳도 욥바였습니다. 욥바는 현재에도 만 명 넘는 인구가 거주하는 시가지로 남아 있으며, 이 욥바 부근에서 발전하여 세워진 현대 도시가 바로, 이스라엘 최대 도시인 텔아비브입니다. 사도 시대에 욥바는 복음이 유대에서 이방으로 수출되는 항구가 되었습니다. 다비다 사건은 욥바에 복음이 퍼지게 했고, 그 복음이 이방을 향하게 했습니다.
베드로 사도가 무두장이(피장이) 시몬의 집에 머문 것도 상당한 의미가 있습니다. 무두장이, 혹은 피장이란 말은 가죽 제품을 만드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가죽일은 죽은 시체를 만지는 일이기 때문에 유대인에게는 부정한 직업에 속합니다. 유대인의 미쉬나에 보면 가죽 일을 하는 남편과는 이혼해도 좋다는 교훈이 있습니다. 그렇게 부정한 직업을 가진 시몬의 집에, 또 한 명의 시몬, 사도 베드로가 머물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정통적인 유대인입니다. 그가 비록 예수를 믿고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해도 그는 할례를 받고, 부정한 음식을 먹지 않는 유대인 사회에 속해 있었습니다. 그런 베드로가 이제는 유대인이 부정하게 여기는 음식을 먹고, 부정하게 여기는 사람과 몸을 맞대고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이제 베드로 자신도 그리스도 안에서 이방인의 장벽을 넘어서고 있다는 뜻입니다. 또한 복음이 이방인을 향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베드로는 유대인의 사도였지만, 이방인에게 복음의 문을 연 것은 베드로 사도입니다. 다음 장면, 10장과 11장에서 이방인 고넬료가 구원받는 장면이 바로 그런 내용입니다. 애니아의 치료를 통해서처럼, 다비다의 소생을 통해서도 하나님이 이루시려는 목표는 이방인의 구원입니다.

3.오늘 공부한 애니아와 다비다의 사건을 통한 하나님의 궁극적 목적은 무엇이었습니까?

오늘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이 이루시려는 목표도 마찬가지입니다. 혹시 죽음에서 건짐 받은 분들이 있습니까? 주님께서 왜 우리의 병을 고쳐주셨을까요? 왜 내게 기적을 베풀어 주셨을까요? 주님의 목표는 분명합니다. 내게 나타난 기적을 통해서 영적 이방인인 가족들, 아직도 주님을 알지 못하는 가족들을 부르시기 위함입니다. 오늘 내 주변에 있는 모든 이방인들이 나 때문에 구원 받는 통로가 되시기 바랍니다. 욥바와 같은 불 신앙적이며 이교적인 내 주변이 모두 주님을 알게 되는 구원의 역사가 나타나는 믿음을 가져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