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회 공과 2012년 11월 2일

이방인들도 성령을 받다.
사도행전10장44절~48절

베드로가 성령의 인도를 따라 고넬료의 가정을 찾게 되었고 성령의 역사로 그 가정에 머물며 말씀을 전하고, 성령의 충만함으로 온 가족들이 세례를 받고 구원받게 되는 이야기입니다. 이 사건은 베드로의 삶의 한 단원을 매듭 짖는 장면으로 생각하고 싶습니다. 베드로는 성령의 인도를 따라 그 생애에 한 단원을 이 사건을 통해 아름답게 마무리했음을 볼 수 있습니다.

1. 오늘 이 사건을 통해 베드로의 삶을 회상하여 봅시다.

베드로의 삶에 대한 회상

21세기로 진입하는 시점에서 현 세계의 지성이라 손꼽히는 24인이 함께 참여해서 [시간 박물관]이란 책을 펴냈습니다. 이 책의 첫 번째 장의 제목이 ‘시간의 창조’입니다. 여기서 어떻게 인간이 시간을 발견하게 되었고, 이것을 어떻게 체계화하게 되었고, 이것을 어떻게 삶에 적용해왔는가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 책의 편집인으로서 저자를 대표하는 학자인 움베르토 에코라는 분은 모든 인류의 문화 안에 공통적으로 시간의 창조가 있다고 확인하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인류의 가장 위대한 발견은 바로 시간의 발견이다. 그리고 이것이 인간의 가장 독특한 문화적 특징이다.” 그렇습니다. 인간만이 시간의 흐름을 감지했습니다. 그리고 그 흐름을 잴 수 있는 도구를 발명해 냈습니다. 바로 시계입니다. 그리고 그 시간의 흐름의 매듭을 만들어 냈습니다. 바로 달력입니다. 그러면서 그 시간의 흐름의 매듭에 의미를 부여했습니다. 바로 생일, 무슨 띠, 몇 세기 같은 것들입니다. 개나 돼지와 같은 동물들은 시간의 흐름을 감지하지 못합니다. 어제, 오늘, 내일과 같은 시간의 매듭을 지을 줄 모릅니다. 물론 그 시간의 매듭들이 주는 의미도 찾을 줄 모릅니다. 그래서 동물의 세계에는 역사가 없습니다. 수천 이 흘러도 역사가 남지 않고, 더 중요한 것은 문화를 발전시켜가지 못합니다. 천 년 전에 사는 모습이나 오늘 모습이 동일합니다. 그리고 천년 후 또한 마찬가지일 것입니다.그러나 인간은 다릅니다. 시간의 매듭을 만들고, 그 매듭마다 의미를 부여하고 삽니다. 그 의미들이 쌓여서 역사가 되고, 그 역사가 흘러가면서 삶의 모습 곧 문화가 발전되어가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시간의 매듭을 잘 짓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이 우리 삶의 발전에 결정적인 요인입니다. 시간의 매듭을 잘 짓지 못하면 그 사람의 삶은 발전이 없습니다. 그러나 시간의 매듭을 잘 지으면 그 사람의 삶은 나날이 발전이 있게 됩니다.

오늘 말씀은 행 10장의 마무리 부분입니다. 베드로가 성령의 인도를 따라 고넬료의 가정을 찾게 되고, 성령의 역사로 그 가정에 머물며 말씀을 전하고, 성령의 충만함으로 온 가족들이 세례를 받고 구원받게 되는 이야기입니다. 오늘 말씀은 한 사건의 매듭을 짓는 장면입니다. 베드로는 성령의 인도를 따라 한 사건을 아름답게 마무리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사건을 작은 단위의 시간의 매듭으로 볼 때에도 베드로는 아름답게 매듭을 지었습니다.
우리말에 시작이 반이라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시작이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생겨난 말일 것입니다. 그러나 끝은 전부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마라톤을 뛰는 선수가 처음부터 선두에 서 달렸습니다. 42키로까지는 역대 다른 기록과 비교해 볼 때 최고의 기록입니다. 그러나 42키로 지점에서 기권하고 말았습니다. 그 사람은 그 동안 아무리 잘 뛰었어도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끝이 중요합니다. 용두사미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작심하고, 혈서를 쓰고 시작해도 마무리 매듭을 짓지 못하면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가 아름답게 매듭을 지어야 합니다.

오늘 말씀에서 베드로가 아름답게 매듭을 지을 수 있었던 것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베드로의 사역 시작에서부터 마지막까지 함께 하셨고, 그 마무리 매듭도 역사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성경말씀 44절을 보면 마지막 장면에서 더욱 풍성하게 성령의 역사가 임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아름다운 매듭을 짓기 위해서는 성령의 인도를 받는 것이 필요합니다. 내 뜻대로, 내 판단대로, 내 감정대로 마무리하게 되면 그 마무리가 아름답기가 어렵습니다. 우리의 욕망, 그동안 쌓였던 감정에 사로잡혀서 그 마무리가 추하게 되기가 쉽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점에 관해서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남기고 있습니다. 갈 3:3을 보면 “너희가 성령으로 시작하여 이제 육체로 마치겠느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성령의 인도로 시작을 했습니다. 그런데 도중에 변했습니다. 하나님의 뜻보다 자기의 뜻을 앞세우기 시작했습니다. 성령의 인도를 따르기보다는 자기의 욕망을 앞세우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될 때 그 매듭은 추해집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시작했으면 성령으로 마쳐야 합니다. 이것이 아름다운 매듭의 필수적인 조건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공부에 나타난 베드로는 그 동안 무능한 예수님의 제자가 아닌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 순종하는 신실한 예수님의 참다운 제자가 되었습니다. 이후의 베드로의 삶은 다시는 뒤 돌아 가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지금도 수없이 되돌아가는 생활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무엇이라 말씀 하실까요

2. 성령께 순종하는 삶이 된 베드로와 같이 되려면.

베드로야 말로 최고의 영적 스승이신 예수님으로부터 훈련받은 1등 제자였습니다. 그는 3년 동안 숙식을 같이하며 예수님의 최고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어느 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대부분의 제자들이 제대로 답을 내놓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분명히 답하기를 “주는 그리스도이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으로부터 칭찬과 아울러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라고 인정하실 정도의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가지가지 기적을 직접 보면서 최고의 시청각 교육을 받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물 위를 걷는 기적도 체험했고 변화 산에서 놀라운 광경도 목격할 있었습니다. 또한 베드로는 열심이 대단했습니다. 예수님이 잡히시기 전에 모두가 나를 버리고 도망칠 것이라 예언하셨습니다.

그 때에 “내가 죽을 지언정 절대로 주님을 버리지 않겠습니다.”라고 맹세했고, 과연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이 체포당하실 때 칼을 가지고 주님을 지키려고 했던 용감했고,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때는 다른 제자들은 다 도망쳤으나 베드로만은 끝까지 예수님을 따르려고 대제사장의 뜰까지 따라 갔던 것입니다. 그러나 3년 동안의 최고의 제자훈련, 그리고 그 어느 누구도 보다도 뛰어난 열심이 있었음에도 베드로의 사역을 결국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주님이 나와 함께 깨어있어 달라는 안타까운 요청을 받았음에도 잠만 자다가 말았고, 대제사장의 뜰에서는 조그마한 계집종 앞에서 자기 스승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씩이나 부인하였던 것입니다.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도 가기를 준비하였나이다.”라고 호언장담했는데 몇 시간 안 되어 그 맹세를 저버린 꼴이 된 것입니다.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한 마디로 말하면 아직도 성령의 능력을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오순절 이후 베드로가 성령 충만을 받은 후 어떻게 변화되었습니까? 그렇게 비겁하던 베드로가 아무리 유대인들이나 관원들이 위협해도 공개적으로 담대히 예수님을 전합니다. 또한 별로 학벌이 없는 분이 설교할 때에 구약의 말씀을 너무나 잘 인용하면서 너무나 잘 합니다.

더 나가서는 설교할 때에 얼마나 능력이 있는지 하루에도 3천 명, 5천명이 회개하고 세례를 받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보아도 설교하는 도중에 고넬료 가정에 모든 식구들이 성령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도 아니고 이방인에게 이런 역사가 나타나니 유대인들이 모두 놀라워했다고 했습니다. 그 뿐 입니까? 행3장에 보면 앉은뱅이도 고치고 행9장에 보면 베드로가 8년 된 중풍병자도 고치고 죽었던 도르가를 살리는 놀라운 기적도 나타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의 일을 할 때 제자훈련을 받는 것도 중요하고 신학교를 다니는 것도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성령의 능력을 받는 것입니다.

성령의 능력을 받으면 아무리 마른 막대기 같은 존재라도 강하게 쓰시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성령 충만을 받을 수 있습니까?
1. 성령은 선물로 주신 줄 믿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 두 가지 선물을 받는데
(1)구원의 선물을 받습니다.
구원은 철저히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의 선물입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는 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로마인이나 백인이나 흑인이나 주인이나 종이나 남자나 여자나 제한 없이 구원을 받습니다. 엡2:8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2)믿는 자에게 또 하나 주어지는 선물은 성령이십니다.
오늘 본문 38절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고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분은 ‘성령을 받으라.’는 말은 번역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아니, 삼위일체의 한 분되시는 성령님을 ‘영접하라, 성령을 모시어 드리라.’고 하는 표현이 옳지, ‘성령을 받으라.’고 하는 것은 너무나 경박한 표현 같습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번역이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성령을 받으라.’는 표현은 옳습니다. 그렇다면 왜 성령을 받으라고 표현했을까? 성령을 선물로 보내셨기 때문입니다. 선물은 받는 것이지, 모셔 들이는 것이 아닙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우리 성도들에게 구원의 선물과 성령의 선물, 두 가지를 주시는데 구원의 선물은 받았으나 성령의 선물을 받지 못한다면 어리석은 성도가 아니겠습니까?

성령을 주시는 이유는 구원받은 성도가 악한 세상에서 능력 안에서 그 구원을 지킬 뿐 아니라, 받은바 충성과 전도의 사명을 능력 있게 감당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기독교인들 중에 중생을 받아서 영적인 어린이는 되었는데 성령의 권능을 받지 못함으로 성장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언제나 시험이 오면 쉽게 넘어집니다. 성령의 열매를 맺지 못하고 있습니다.

나는 지금 어떠한 상태에 있습니까? 하나님이 성령을 선물로 주시는 데도 받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을 거역하는 자세와 같습니다. 여러분이 누구에게 선물을 주려는 데 받지 않아 보세요. 얼마나 민망하겠습니까? 나중에는 자기를 무시하는 줄 알고 화가 날 것이 분명합니다. 성도 여러분이여. 여러분은 구원의 선물은 물론이고 성령을 선물로 받으셔서 이제부터는 능력 있는 성도의 삶을 사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⓶ 성령의 모든 것을 성경대로 믿어야 합니다.

많은 성도들이 성경을 사랑하고 성경대로 살려고 하지만 성령에 대해서는 어느 것은 믿고 어느 것은 믿지 않습니다. 이는 예수님 당시 하나님을 가장 잘 믿고 구약 성경을 신처럼 받드는 종교 지도자들이 오히려 성경대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전혀 믿지 않은 것과 같은 모습입니다. 오늘날도 성경을 가장 잘 안다는 분들 중에 성령의 역사는 초대 교회 시대만 나타난 사실로 인정하고 지금은 그런 역사가 나타나지 않는 것처럼 주장하는 분도 있습니다.

그래서 성령을 받은 자, 은사를 받은 자를 보면 신비주의자로 비판하고 심지어는 성령을 받은 자를 마치 악령을 받은 자인 양 취급합니다. 이러한 자세는 성령에 대한 큰 죄를 짓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성령에 대한 범죄를 몇 가지로 말해 주고 있습니다.

a. 행7:51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가 항상 성령을 거슬려 너희 조상과 같이 너희도 하는 도다.”고 했는데 이는 성령을 거슬리는 죄입니다.
b. 엡4:30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고 했는데 이는 성령을 근심하게 하는 죄입니다.
c. 살전5:19 “성령을 소멸치 말며”고 했는데 이는 성령을 소멸하는 죄입니다.
d. 고전3:16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고 했는데 이는 성령의 전을 더럽히는 죄입니다.
e. 마12:31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고 했는데 이는 성령을 훼방하는 죄로 아무리 회개해도 사하심을 받지 못하는 무서운 죄인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성령의 역사하심을 악령의 역사하심인양 주장하거나 정죄하는 자세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령의 능력을 받으려면 먼저 성경에 나타난 사실대로 성령의 능력과 은사를 인정하여야 합니다.

신약에는 ‘성령’이라는 단어가 도합 147회나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 중 사도행전에서 54회, 로마서 45회, 공관복음 34회, 요한복음과 기타 서신에서 23회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성경에서 누누이 강조되고 있는 성령에 대해서 우리가 외면한다는 것은 죄인 것입니다. 유명한 부흥사 촬스 피니는 ‘죄인들이 회개하지 않는 것이 죄가 되는 것처럼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으로 충만하지 않는 것이 죄이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대로 성령의 능력을 믿고 인정하는 자에게 성령을 임하는 것입니다. 또한 성령의 능력이 내게도 임할 수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어느 기독교인들은 성령의 능력과 은사는 특수한 자에게만 임하고 자기 같은 껍데기 신자에게는 임할 수 없다고 포기하는 경우를 봅니다. 아닙니다. 행2:39에 보면 분명 모든 자에게 임하신다고 했습니다.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구원의 선물을 받을 수 있는 것처럼 성령의 권능도 믿는 자는 누구든지 받을 수 있는 줄 믿어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이여. 성령의 능력을 사모하여 간절히 구하십시오. 그러면 어느 순간에 하나님은 성령의 능력을 선물로 주십니다.

⓷ 철저한 회개를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설교를 듣는 사람들이 마음이 찔려 외치기를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라고 하자, 베드로는 외치기를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라고 했습니다. ‘회개하라’고 했습니다. ‘회개하여’란 원어는 헬라어로 ‘메타노에사테’인데 그 뜻은 ‘마음을 바꾸라’는 것입니다. 흔히 회개하라고 하면 겉으로 지은 죄를 회개합니다.

즉, 입으로 지은 죄, 행위로 지은 죄, 용서 못한 죄, 주일예배에 빠진 것, 불충성, 부모에게 불효한 것, 기도 못한 죄 등등을 회개합니다. 그러한 죄도 마땅히 회개해야 하지만 그러나 진정한 회개는 마음을 바꾸는 것입니다. 아무리 입으로 지은 죄를 회개할지라도 그 죄에 대한 마음의 태도를 바꾸지 않는다면 그것은 회개가 아닙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회개는 자기중심의 마음에서 하나님 중심의 마음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지금까지는 내 중심, 내 이익, 내 자랑을 중심 하던 마음에서 방향을 바꾸어 하나님 중심, 하나님의 이익, 하나님의 자랑의 마음으로 바꾸는 것을 진정한 회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로 그것이 진정한 회개의 모습인 것입니다. 베드로가 성령의 선물을 받으려면 회개하라고 강조한 것은 자기의 경험에서 울어난 고백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마가다락방에서 온 성도들과 더불어 10일 동안 기도하는 동안 가장 집중적으로 기도한 것은 회개였을 것입니다.

자기가 세 번씩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을 때 자기를 돌아보시던 예수님의 그 슬픈 눈동자가 계속 떠올라 가슴을 치면서 어느 때는 꺼이꺼이 울면서 회개했을 것입니다. 수제자라고 교만에 빠져서 ‘죽을지언정 주님을 절대로 떠나지 않겠다.’고 장담하던 자기 자신이 너무나 부끄러워서 회개하면서 자기를 철저히 버리기로 결단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회개란 자기의 능력과 경험을 의지하던 것에서 돌이키어 철저히 주님의 능력만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직 성령만 의지하기로 결단하고 자기를 비울 때 그 빈 심령 안에 성령께서 강하게 충만히 임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성도들은 주 안에서 녹아진 것 같은데 어느 시간에 보면 옛 구습의 모습이 나옵니다. 얼마나 혈기를 부리는지요. 세상 사람과 다른 것이 없습니다. 어느 때는 온유해 보이는 데 어느 순간에는 얼마나 자기 고집이 강한지요, 조금도 양보를 안 합니다. 어느 때는 희생적인 것 같더니 결정적인 순간에는 자기 이득을 철저히 챙기기에 바쁩니다. 자기의 것은 한 푼 어치도 손해를 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어느 때는 얼마나 마음이 옹졸한지 남을 조금도 용서하지 못합니다. 겉만 익은 신자의 모습입니다. 참숯이 되려면 완전히 타야 합니다. 겉만 타다 만 숯은 얼마나 냄새가 나고 가스가 발생하는지 위험합니다. 주님 안에서 철저히 깨어지고 녹아진 자에게 성령의 불이 붙기가 얼마나 쉬운지 모릅니다.

베드로와 제자들, 성도들이 10일 동안 철저히 회개할 때에 성령의 역사가 강하게 임한 것처럼 우리도 자기의 능력만 의지하던 교만 죄를 회개할 때에 성령은 임하시는 것입니다. 평양 대부흥 운동은 1907년 1월 14일 장대현교회에서 열린 부흥사경회에서 당시 한국인 최초의 장로교 목사 안수를 앞두고 있던 길선주 장로가 자신의 죄를 공개적으로 털어놓은 것이 시발점이 됐습니다. 이어 교회 지도자들과 교인들은 ‘축첩했다’ ‘장사에서 폭리를 취했다’며 자신의 죄를 털어놓고 회개하는 회개릴레이가 펼쳐졌습니다. 저녁에 시작된 예배는 새벽까지 이어졌습니다. 그때 살인죄와 도둑 등 사적인 비밀을 남김없이 털어놓은 부흥회장은 ‘지옥의 문이 열린 것 같았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부흥회 전엔 양반과 상놈들이 예배당 안에서도 따로 앉았는데, 부흥회가 끝나기도 전에 함께 앉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부흥회의 열기는 삼남지방 목포까지 전해져 회개와 부흥의 운동이 확산됐습니다. 평양 숭실학교, 광성학교. 숭의여학교 등 학생들도 참여했습니다. 교회마다 대대적인 회개 운동이 일어났고 전국에 새로운 교회가 세워졌으며 신자 수는 3배로 늘었습니다. 이 운동은 한국 개신교 토착화의 결정적 계기가 됐고, 새벽기도회, 금요철야기도회 등 한국 개신교의 특징들도 이 당시에 태동했습니다. 또한 그 파장은 3·1 운동으로 이어졌고, 개신교 교세가 폭발적으로 신장되는 계기가 됐습니다. 성령을 받기를 원합니까? 나 중심주의가 철저히 깨어지고 하나님 중심주의로 마음을 바꾸십시오. 그 때에 성령의 강한 역사가 임할 줄 믿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⓸ 갈급하게 구하는 것입니다.

갈급하게 사모하지 않는 자에게 성령께서는 임하지 않으십니다. 진주의 가치를 모르는 돼지에게 그것을 줄 수가 없는 것처럼 성령의 권능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 자에게 주시지 않는 것은 귀하게 여기지 않음으로 역사 하실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에 나오는 고넬료와 함께 있던 자들이 성령의 능력을 받은 것은 갈급하게 사모했기 때문인 줄 압니다.

고넬료와 더불어 가이사랴 신자들은 예루살렘에서 나타난 성령의 역사를 소식을 듣고는 그 때부터 자기들에게 성령의 능력을 달라고 구했을 줄 압니다. 그런 간절한 사모함이 하나님께 상달됨으로 마침내 베드로 사도를 그 곳에 보내셨으리라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능력을 사모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왜 갈급한 자에게 성령을 주십니까? 갈급히 원하여 받은 성령의 권능은 너무나 귀하게 여길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일주일 동안 금식하고 받은 은사가 있다면 그것을 잃을까 봐 늘 조심할 것입니다. 제자들은 마가 다락방에서 내내 회개하면서 약속의 성령을 기도로 사모하다가 결국 강한 능력들을 받았습니다. 좀 전에 언급한 유명한 부흥사 촬스 피니는 원래는 변호사였습니다. 그런데 저에게 성령의 능력에 대한 갈급한 마음이 일어났습니다. 저는 열심히 기도하고 성경을 많이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간절히 사모합니다. 철저히 회개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난로 옆에 앉으려고 하는 순간에 강력한 성령의 불이 임했습니다. 그는 그때에 체험을 고백하기를 마치 전기 파동이 온 몸과 영혼을 꿰뚫고 들어오는 것 같았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숨결과 같기도 했고, 마치 거대한 선풍기를 자기 앞에 돌리는 것과 같았다고 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뭐라고 표현할 길이 없어서 기쁨과 사랑으로 소리 내어 엉엉 울었다고 합니다. 무슨 산 기도나 부흥회를 참석하지 않았더라도 간절히 사모하고 꾸준히 기도한 결과 이런 놀라운 능력을 체험할 줄 믿으시고 우리의 무력함을 주 앞에 호소하면서 능력을 달라고 간절히 간구함으로 성령을 받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⓹ 철저한 순종을 각오해야 합니다.

제자들은 오순절날 성령의 능력을 받기 전에 그 동안 우쭐거리며 불순종하던 자기들의 모습을 회개하며 약속의 성령을 주시면 땅 끝까지 증인이 되기로 순종을 각오하였던 것입니다. 과연, 성령의 불로 녹이지 다음에 모든 제자들은 180도로 달라졌습니다. 철저히 순종하는 종이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성령의 역사는 베드로와 고넬료가 동시에 순종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고넬료가 매일 세 번씩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는 음성을 듣고 즉시 하인 둘과 부하 가운데 한 사람을 욥바로 보냈습니다. 그 때 베드로는 욥바에 있는 피장 시몬의 지붕에 올라가 기도하는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환상 중에 하나님이 보자기에 담긴 각종 네 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을 보이시면서 “잡아먹어라”고 명하셨습니다.

그 때에 베드로는 “속되고 깨끗하지 아니 한 것을 내가 먹지 않겠다.”고 거부했습니다. 그 때 하나님이 깨끗케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 때에 고넬료가 보낸 종들이 자기를 찾는 말을 듣고 깨닫기를 하나님이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명령인 줄 알고 순종했습니다. 사실, 그 당시 유대인들의 입장에서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너무나 꺼리는 일이었지만, 베드로는 자기의 주견을 버리고 오직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 것입니다.
그 결과, 성령의 놀라운 역사가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성도들은 열심히 성령 충만을 구하면서도 하나님의 명하시는 일에는 순종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어리석은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성도 여러분들이여, 여러분은 금년 한 해 하나님이 강하게 쓰시는 일꾼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우리 모두가 자기의 능력을 보지 마시고 오직 뜨거운 회개와 불타는 갈급성과 철저한 순종의 각오를 통해서 성령의 능력을 받아서 다시 한 번 우리 온 국민들과 삼천리 이강토에 심령에 부흥의 불길이 일어나기를 간절히 기도 합시다.

3. 내가 성령께 순종하는 삶이되는데 가장 큰 장애물은 무엇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