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회공부 2012년 12월 21일
바울과 바나바 비시디안디옥에서 전도하다
사도행전13장13절~52절
하나님께서는 시대마다 그의 마음에 맞는 사람을 골라서 그가 의도하시는 일의 중심에 세우십니다.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리라”고 하였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발탁되어 선민 이스라엘 왕국의 뿌리가 되었고 그의 후손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나게 하였습니다(마 1:1). 시편 89:20에 하나님께서는 “내가 내 종 다윗을 찾아내어 나의 거룩한 기름을 그에게 부었도다.”고 하였습니다.
1. 하나님께 쓰임 받는 사람의 특징은?
하나님에게 물어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하나님, 다윗처럼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나님, 하나님께서 다윗을 선택하셨기 때문에 다윗이 위대한 인물이 되었습니까? 아니면, 다윗에게 하나님의 마음에 들 만한 어떤 이유가 있어서 하나님이 선택했습니까?” 이에 대한 성경의 대답은 이렇습니다. 첫째, 이 두 질문을 분명하게 구별하지 않고 있습니다. 둘째, 하나님은 당신의 마음에 합한 자를 버린 적이 없습니다. 셋째, 아무리 약자라도 하나님이 들어 쓰실 때 그는 위대하게 쓰임 받았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쓰임 받고 싶은 욕구가 있습니다. 할 일이 있다고 하는 것, 쓰임 받고 산다는 것은 정말 행복한 일입니다. 그릇이라고 다 그릇이 아닙니다. 쓰임 받고 사는 그릇이 있고 쓰임 받지 못하는 그릇이 있습니다. 우리 가정에도 보면 큰 그릇이 쓰임 받는 것이 아니고 아침저녁으로 국 담고, 밥 담고, 반찬 담는 – 쓰임 받는 그릇도 있습니다. 우리 한국교회가 쓰임 받는 그릇을 만들지 아니하고 너도 나도 큰 그릇만 만들려고 하기 때문에 사회가 이렇게 어지러운 것이고, 교회가 신령함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큰 그릇은 별로 쓸모가 없습니다. 일 년에 한 번씩 김장 할 때나 옆집에서 빌려다 써도 그만입니다. 그러나 간장 종기같은 작은 그릇은 매번 쓰임을 받는 거지요.
성경에 보면 유능한 사람인데도 버림당한 사람이 있고 무능한 사람인데도 크게 쓰임 받은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버림받은 사람의 대표로 사울을 들고 있고 쓰임 받은 사람의 대표로 다윗을 들고 있습니다.
“사울을 폐하시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증거 하여 이르시되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행13:22)
「내가 그를 쓰겠다」- 다윗을 쓰시겠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버리시고 어떤 사람을 들어 쓰십니까?
첫째 하나님은 약자를 쓰십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쓰신 첫 번째 이유는 대단히 역설적인 이야기가 되겠습니다만 다윗이 약자였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약자를 들어 쓰십니다. 사무엘상 16장에 보면 사무엘이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이새라는 사람의 집으로 갑니다. 이새는 일곱 아들과 함께 몸을 성결하게 하고 사무엘 앞에 섰습니다. 그러나 그 일곱 아들이 다 지나가도록 하나님의 응답은 “내가 택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이새의 아들 8형제 중 막내로서 아버지도 그에게 별 기대를 하고 있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왕이 될 면접시험에 다윗은 빠져 있습니다.
그때 사무엘이 묻기를 ‘네 아들이 다 여기 있느냐?’ 이새의 대답이 사무엘상 16:11에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아직 말째가 남았는데 그가 양을 지키나이다”
여기 말째라는 말은, 단순히 형제 서열상 말째라는 말만은 아닙니다. 사람들 앞에 약자였음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택했습니다. 약자를 택했습니다. 하나님의 관점과 사람의 관점은 동일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기준과 사람의 기준은 같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사람의 뜻은 달랐습니다.
하나님 앞에 쓰임 받기를 원하십니까? 자기 자신이 말째임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고 약한 자, 겸손한 자를 쓰십니다.
사울 임금이 버림 받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사울은 자기 자신의 한계를 몰랐습니다. 왕이라고 제사장이 하는 제사까지 다 집례할 수 있을 줄로 알았습니다. 그리고 갈멜산에는 자신을 위하여 승전 기념비를 세웠습니다. 그래서 교만한 사울 임금을 버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신약에 사울이라는 이름을 가진 또 다른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사울이라는 이름의 뜻은 “큰 자”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님을 만난 이후 “큰 자”라는 이름을 바꾸어 “작은 자” 즉 바울 이라고 고쳤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을 지극히 작은 자라고 고백했고, 성도 중에서도 작은 자라고 말했으며, 죄인 중에서도 괴수라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은 그가 큰 자로 남아 있을 때 친히 나타나 대적하셨고 작아 질 때 크게 들어 쓰셨습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쓰십니다. 작은 자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스스로 말째라고 여기는 사람을 첫째로 들어 쓰십니다.
“말째가 남았는데 그가 양을 지키나이다.” 이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상상력이 필요합니다. 이 말은 “말째가 하나 있기는 한데 만나 보나마나입니다. 신통한 구석이 없습니다. 그 아이는 아닙니다.” 이런 뜻입니다.
아버지만 그렇게 생각한 것이 아니라 그 형님들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말째야, 우리 형제들 가운데 임금이 나올 모양이다. 우리는 사무엘 선지자를 만나러 갈테니 넌 여기서 양을 치고 있거라.” 아니 한 걸음 더 나아가 아버지와 형님들만 그렇게 생각한 것이 아니라 다윗 자신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분명 난 아니야. 난 심부름이나 해야지.’
보십시오. 그의 부모는 그를 부정했습니다. 그의 형제들도 그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자신도 자신을 부정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인정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이 사람이 바로 그다 일어나 기름을 부으라”
바로 여기에 우리가 하나님께 쓰임 받는 비결이 있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이 No 하고 당신 자신마저도 No 할찌라도 하나님께서 Yes 하시면 당신은 하나님의 사람, 하나님의 사역자, 쓰임 받는 사람이 됩니다. 믿습니까?
둘째 하나님은 자기를 지킬 줄 아는 사람을 쓰십니다.
“아직 말째가 남았는데 그가 양을 지키나이다”
두 번째, 우리를 주목시키는 단어는 “그가 양을 지키나이다”라는 말씀입니다.
이새의 아들 가운데 왕이 나온다면 다윗도 관심을 가지고 쫓아 왔을 법도 한데 다윗은 양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묵묵히 자기가 맡은 일에 충성을 다하고 있었단 말입니다.
하나님의 일이란 높은 것도 없고 낮은 것도 없습니다. 귀한 것도 없고 천한 것도 없습니다. 자신이 맡은 그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면 하나님이 기억하시고 축복하십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이 쓰는 사람은 언제나 자기 일에 성실한 사람이었습니다.
요셉은 옥중에서 모범적인 죄수로 일을 하고 있을 때 부름을 받고 쓰임을 받았습니다. 사무엘은 깊은 밤 성전에서 자신이 맡은 일을 감당하고 있을 때 하나님이 그를 불렀습니다. 엘리사는 밭을 갈고 있을 때, 베드로는 바다에서 그물을 던지고 있을 때 하나님이 그를 불러 쓰셨습니다.
특별히 “양을 치고 있었다.”고 하는 말은 영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모세는 미디안 광야에서 장인 이드로의 양을 치다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베들레헴 목자들은 밖에서 자기 양떼를 치다가 천사의 음성을 듣고 아기 예수께 경배했습니다. 다윗이 양을 치다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것은 장차 하나님의 양떼인 이스라엘을 통치하게 될 것이라는 암시였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자신이 맡은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사람을 쓰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무식한 사람도 쓰십니다. 무능한 사람도 쓰십니다. 죄가 많은 사람도 쓰십니다. 그러나 책임감이 없는 사람, 열정이 없는 세상, 성실하지 못한 사람을 쓰는 법이 없습니다.
우선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모두 어린 양입니다. 때문에 자기라는 양을 잘 지켜야 합니다.
- 날마다 하나님과 교통하므로
- 날마다 하나님의 임재와 권능을 경험하므로
- 하나님 아버지 앞에 성실한 자녀가 되어 자신이라는 어린 양을 잘 지켜야 합니다.
- 자신의 믿음을 잘 키켜야 합니다.
- 그리고 내게 맡겨진 사람들을 잘 지켜야 합니다.
하나님은 자기 동생을 지키기는커녕 동생을 해친 가인에게 물었습니다. “네 동생 아벨이 어디 있느냐” 이때 가인의 대답이 무엇이었습니까? “내가 내 동생을 지키는 자니이까?” 가인은 중요한 사실을 몰랐습니다. 아벨은 아버지 어머니나 지키는 자인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를 해쳐도 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가인은 동생을 지키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가족, 우리의 속회 곧 믿음의 가족들을 지키는 사람입니다. 나아가 우리는 우리에게 맡겨진 사역을 지키는 사람들입니다. 맡겨진 사역 앞에 진실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심판의 기준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네게 맡겨진 작은 일에 충성했느냐”하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다윗이 하나님으로부터 쓰임 받은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가 양을 지키나이다.” 형님들이 다 떠나간 그 자리에서 혼자 양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셋째, 하나님께서 다윗을 선택하신 가장 분명하고 확실한 이유가 사무엘상 16:7에 나옵니다. 하나님을 중심에 모시고 사는 사람을 쓰십니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 …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이새의 일곱 아들을 다 거절하신 하나님께서 다윗의 중심을 보셨습니다. 다윗의 중심이 어쨌다는 이야기입니까? 다윗의 중심에 무엇이 있었다는 말입니까? 사무엘상 17장에 보면 동서고금 남녀노소 모든 사람의 손에 땀을 쥐게 하는 멋진 이야기가 나옵니다.
하나님을 모독하는 블레셋 장군 골리앗 앞에 모두 주눅이 들어 도망갈 궁리만 하고 있던 차에 소년 다윗이 나타나 사울 임금에게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나를 사자의 발톱과 곰의 발톱에서 건져 내셨은즉 나를 이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도 건져 내시리이다” 나 정도의 용맹이면 해 볼만 합니다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하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의 눈에는 하나님이 보입니다. 일꾼들의 눈에는 일이 보입니다. 교회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눈에는 교회가 보이게끔 되어 있습니다.
적장 골리앗 앞에 선 다윗의 말을 들어 보십시오.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 계속해서 그는 말했습니다.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로 알게 하리라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붙이시리라”
다윗의 중심에는 하나님의 이름이 있었습니다. 다윗은 철저히 하나님 중심으로 살았습니다. 그는 하나님만 두려워했고 하나님의 능력만 믿었습니다. 그가 무서워한 것은 블레셋의 거인이 아닙니다. 적군의 힘이 아닙니다. 사울 임금의 권력을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형님들을 전술을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만 의지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높이는 다윗의 마음을 보셨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그 마음을 보셨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중심을 보셨습니다. 역대하 16:9에서는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시어 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를 위로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울 임금이 “하나님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나도 저를 버렸다” (삼상15:23)고 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을 높이실 때 그를 높여 주셨습니다. 이제 결론은 분명합니다. 인본주의 – 자기중심 자기 고집대로 살 것이냐? 아니면 신본주의 – 하나님 중심, 하나님 제일주의로 살 것이냐 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버리는 사람이 되느냐 아니면 하나님이 크게 쓰는 사람이 되느냐를 결정하는 갈림길이 됩니다.
골리앗의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은 골리앗이 되고, 다윗의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면 다윗처럼 하나님 앞에 사랑을 받게끔 되어 있는 것입니다.
다윗 가치관
하나님의 이름
하나님을 의지함, 자신의 약함
하나님의 능력
골리앗의가치관
칼, 창, 단창
자신의 힘과 큰 키, 외모를 자랑
자신의 힘
넷째 하나님은 성령의 사람을 쓰십니다.
사무엘상 16:13에 보면 다윗이 사무엘 선지자로부터 기름부음을 받고 난 “이 날부터 다윗이 여호와의 신에게 크게 감동 되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성령이 다윗과 함께 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때문에 하나님은 영적인 사람을 쓰십니다. 사무엘상 18:10에 보면 “그 이튿날 하나님께서 부리시는 악령이 사울에게 힘 있게 내리매 그가 집 안에서 정신없이 떠들어대므로”라고 했습니다. 이미 악령에 사로잡혀 하나님으로부터, 사람으로부터 버림을 받은 것입니다. 악령에게 붙들리면 악령의 종이 되고 성령에 감동되면 성령의 사람이 됩니다.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던 다윗은 하나님께 눈물로 간구하는 기도 가운데 이런 말을 합니다. “나를 주 앞에서 쫓아 내지 마시고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시51:11)
다윗은 궁궐에서 쫓겨 나는 것보다 주 앞에서 쫓겨나는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다윗은 왕관을 거두어 가는 것 보다 성령을 거두어 가는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재물과 권세를 빼앗기는 것보다 주의 은혜를 빼앗기는 것이 더 두려운 줄 알고 살았습니다.
하나님으로 충만했던 다윗은 하나님을 몹시도 사랑했던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다윗은 하나님을 기뻐하고 찬양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시편에 실린 다윗의 시들을 보십시오. 하나님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습니까? 그는 시로써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법궤를 예루살렘에 들여올 때에는 너무 좋아서 그 행렬을 따르며 부끄러움도 잊은 채 춤을 추었습니다. 이렇듯 그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기뻐하는 신앙적 감동과 시적 감성이 풍부한 사람이었습니다. 지극히 예술적인 사람이었습니다. 나아가 다윗은 철저하게 교회 중심의 사람이요 성전 중심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을 사모하여 하나님의 성전을 짓고, 그 성전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치는 사람이었습니다.
다섯째, 하나님 앞에 쓰임 받는 사람은 치러야 할 대가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다윗은 지도자로서 하나님 앞에 쓰임 받기까지 당당히 댓가를 지불할 줄 알았던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이 일로 인해 사울 임금의 시기를 받아 쫓겨 다녀야만 했던 고통스런 훈련의 시간들을 불평하거나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사울 임금의 미움을 받은 다윗은 임금으로 기름부음을 받고 정식 왕이 되기까지 자그마치 15년간을 쫓겨다니는데 때로는 엔게디 굴속으로, 때론 이웃나라 블레셋과 가드왕 아기스에게로, 팔레스타인 산지, 평야, 사막 구석구석 사울의 군사를 피하여 도망 다녔지만 그것이 도망 다닌 생활이 아니라 전국의 방방곳곳 이웃나라까지 군사적 지리를 몸소 답사하고 익히는 훈련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분은 하나님뿐이었습니다.
이러한 생활 가운데서 성경에 분명하고도 똑똑히 기록되어 우리의 주목을 끄는 단어는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시더라.” (삼상 16:18, 18:28)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했던 이유였고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까지 자신에게 주어진 훈련의 기회, 자신이 치러야 할 고통스런 댓가를 흔쾌히 치루어 갑니다.
어떤 여인이 철학자 칸트에게 청혼을 했습니다. 그 시대에는 남자가 청혼을 하는 것이 관례였지만 칸트가 청혼을 하지 않자 기다림에 지친 그녀가 먼저 청혼한 것이었습니다. “잘 생각해 보겠습니다.” 정중하게 대답한 칸트는 그 뒤부터 그녀와의 결혼에 대해 신중하게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우선 머리로 그녀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분석했습니다. 그리고 도서관에서 사랑과 결혼에 관한 책을 모조리 찾아 읽었고, 자신의 노트에 결혼에 대해서 찬성하는 의견과 반대하는 의견을 하나하나 적어서 분석했습니다. 그는 생각하고, 생각하고 또 신중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는 동안 많은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래, 이젠 그녀의 청혼을 받아들이기로 하자. 이 보다 더 신중한 결론을 내릴 수는 없다.” 자신이 내린 신중하고 합리적인 결정에 그는 대단히 만족했습니다. ‘오랜 세월동안 생각하고 결정한 만큼 그 누구보다도 근사하게 그녀에게 청혼하리라.’ 마음먹은 그는 다음 날 옷을 멋지게 차려입고 그녀의 집을 찾아갔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그곳에 있지 않았습니다. 대신 그녀의 아버지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이 망설이고 있는 사이 내 딸은 이미 결혼해서 이제는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소. 당신은 너무 늦게 왔군요.?
하나님께 쓰임 받는 생을 살아가고 싶으십니까? 그렇다면 결론적으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나는 연약하기 때문에 큰일을 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말째를 부르셨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세상 모든 사람이다 부정하고 No! 라고 말해도 하나님이 인정하시고 Yes! 하시면 됩니다.
2. 나 자신을 잘 지켜야 합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양떼들, 하나님과의 관계, 자신의 영성, 자신의 믿음, 자신에게 맡겨진 사역을 소중히 지키십시오.
3. 하나님은 나의 중심을 보십니다. 이 땅의 가치관, 골리앗의 가치관으로 살아가지 말고, 하나님의 뜻, 다윗 가치관으로 사십시오. 예수님 이름의 권세를 믿으십시오.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의지하십시오.
4. 성령의 임재와 권능과 감동하심과 함께 하심을 잃지 마십시오. 역사는 그분의 뜻대로 움직입니다. 그 분의 자원과 능력을 구하십시오.
5. 이 일을 이루기까지, 하나님 앞에 영광스럽게 쓰임 받기까지 치러야 할 대가를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지금 나를 쓰시길 원하십니다.
2. 신앙생활 속에서 많이 듣는 은혜란 무엇을 뜻하는 것입니까?
은혜란 말이 헬라 사람들의 인사였습니다. 그 말은 아주 중요한 말입니다. 이 은혜란 말은 성경에 267회나 나옵니다. 역사적인 뜻은 [공짜]란 말이고, 글자의 뜻은 [호감](favor)이란 뜻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이 뜻을 변질시켜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설교에 감동이 있었을 때에 “은혜 받았습니다.”라고 인사를 합니다. 그러면 목회자들이 좋아합니다. 그런데 더욱 재미있는 사실은 예배시간에 졸던 사람도 나올 때의 인사는 “은혜 받았습니다.”라고 인사를 합니다. 그래서 이제 “은혜 받았습니다.”라는 말은 교인들이 목회자들에게 인사하는 말이 되고 말았다는 말입니다. 오늘 은혜란 말을 본래 성경의 뜻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은혜의 참 뜻은 무엇입니까?
자격을 따지지 않는 것입니다. 내 힘으로 얻을 수 없는 것입니다. 내가 갚을 수 없는 것을 말합니다. 세상에는 이와 비슷한 것이 바로 부모님의 사랑입니다. 오늘날 세상에는 두 종류의 신자들이 있습니다. 하나는 종처럼 사는 신자들입니다. 다른 하나는 자녀처럼 사는 신자입니다. 종처럼 사는 신자들은 행위에 근거를 두기 때문에 항상 불안하고, 염려 속에서 삽니다. 주인께서 나를 싫어하면 어떻게 하나 하는 불안입니다. 그러나 자녀는 신분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에 잘하던 못하던 사랑에 대한 확신이 있습니다. 이렇게 행위 지향적인 성도가 있고, 은혜 지향적인 성도가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신자입니까? 자녀처럼 항상 확신 속에서 사는 은혜 지향적인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2. 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어야 합니까?
(1)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우리들이 [구원]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존 뉴톤 목사는 천국에 가면 세 가지의 기적을 보게 될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첫째는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많은 사람들이 천국에 와있는 것을 보게 되는 것이고, 둘째는 내가 꼭 만나리라고 기대했던 많은 사람들이 천국에 오지 못한 것을 보는 것이고, 셋째는 내가 천국에 와있다는 사실이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천국에 가는 것은 기적 중에 기적입니다. 인간적으로도 얼마나 부족한데 어떻게 천국에 갈 수 있습니까? 목사가 목회를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고, 여러분들이 교회에서 직분을 받은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가 천국에 간다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2)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어떤 일에도 [형통과 평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요셉의 형통의 경우를 보십시오. 그는 가는 곳마다 형통했습니다. 능력이 있기 때문도 아니고, 경험이 많아서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었습니다.
(3) 또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주의 일]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고전 15:10)라고 고백을 했습니다. 바울이 그렇게 많은 선교를 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설교를 잘해서가 아닙니다. 사실 바울은 설교를 잘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고후 10장 10절에 보면 바울이 이렇게 고백을 했습니다. “저희 말이 그 편지들은 중하고 힘이 있으나 그 몸으로 대할 때는 약하고 말이 시원치 않다 하니.” 그러므로 주의 일은 하나님의 은혜로 합니다.
(4)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삶을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복이 나의 공로나 수고로 된 것으로 착각하고 살고 있습니다. 돈도 내가 땀 흘려 벌었고, 다 나의 노력으로 된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아닙니다. 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5) 또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노아의 홍수 심판 때 노아의 가족을 제외하고는 다 물의 심판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노아가 구원을 받은 것은 그의 선행이나 공로나 믿음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라고 기록한 점입니다.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창 6:8)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야곱은 우리가 잘 아는 대로 큰 복을 받아 거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야곱이 무엇이라고 고백합니까? “하나님이 내게 은혜를 베푸셨고”(창 33:11)라고 했습니다. 모세가 이렇게 고백을 합니다. “내가 참으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었사오면 원컨데 주의 길을 내게 보이사 내게 주를 알리시고, 나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게 하소서”(출 33:13). 그렇다면 성경에 나오는 모든 사람들은 다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3.삶의 참된 기쁨을 설명하여 봅시다.
옛 속담에 “잘 되면 내 탓, 못 되면 조상 탓”이란 말이 있습니다. 지금도 이런 식으로 많은 사람들이 남을 원망하고 불평하는 것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들을 불행하게 만드는 바이러스입니다. 오늘은 우리의 삶의 활력소요 원동력이 되는 기쁨을 회복하여 우리들이 이 땅에서의 생활이 좀 더 활력 넘치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항상 기뻐하라](살전 5:16절)고 했습니다. 성경에는 가장 짧은 구절이 두 개가 있습니다. 하나는 요한복음 11장 35절의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는 말씀과 다른 하나는 데살로니가 전서 5장 16절의 “항상 기뻐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원문을 보면 요한복음 11장 35절은 세 단어로 되어 있고, 데살로니가 전서 5장 16절만이 두 단어로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 두 구절이 서로 뗄 수 없는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성도들이 기뻐할 수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들에게 동정심을 가지고 은혜를 베푸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동정의 눈물, 사랑의 눈물로 인하여 우리들은 기뻐할 수가 있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이제 우리는 한번밖에 없는 인생을 기쁨 속에서 살아야 합니다. 참 기쁨은 무엇인가? 공부하는 말씀에 나오는 제자들의 기쁨은 어디서 왔는가? 오늘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참 기쁨의 비결은 무엇인가?
1. 먼저 참 기쁨은 무엇입니까?
이 세상에는 잠깐 있다가 없어지는 [잠정적인 기쁨]이 있고, 또 [영원히 계속되는 참된 기쁨]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참 기쁨은 항상 성령이 임할 때 옵니다. 그래서 오늘의 말씀에도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이 충만하더라.”고 기쁨과 성령을 함께 언급했습니다. 기쁨과 성령이란 말을 함께 사용하고 있는 것은 이 둘은 서로 뗄 수 없는 관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할 때에 항상 기뻐할 수 있습니까? 무엇이 참 기쁨입니까? 참 기쁨은 한 마디로 말해서 영원한 기쁨을 말합니다. 이 세상에서 주는 기쁨은 다 잠정적인 기쁨뿐이요 일회적인 기쁨일 뿐 입니다. 그런데 오직 위로부터 주시는 기쁨이라야 영원한 기쁨입니다. 바울이 감옥에 갇혀서도 기뻐할 수 있었던 것은 위로부터 주시는 영적인 기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위로부터 주시는 기쁨은 어떤 기쁨입니까?
내가 주님의 십자가의 보혈로 용서함을 받았다는 [사죄의 기쁨]입니다. 내가 주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양자]가 되었다는 기쁨입니다. 장차 누리게 될 [천국에서의 영광]을 바라볼 때 우리는 기뻐할 수 있습니다. 이 기쁨은 우리가 천국에서 받게 될 상속을 생각할 때 더욱 커집니다. 이 땅에서도 밥이나 먹고, 그저 건강하게 돼지처럼 사는 것이 아니라 사명을 가지고 산다는데 참 기쁨이 있습니다. 지금 우리들의 직업의 높고 낮음을 보지 마시기 바랍니다. 아니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 중에 물론 다윗처럼 높은 자리에 있었던 사람도 없는 것은 아니지만 에스더를 통해서 민족을 구원한 모르드개 같은 사람은 대궐문 앞에서 구걸을 하던 사람이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 같은 여자는 창녀출신으로서 많은 사람들이 기피하던 사람이었습니다. 마태 같은 사람은 세리출신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세상의 어느 누구보다도 큰 사명을 감당했던 사람입니다.
2. 그러면 오늘 말씀에 나오는 예수님의 제자들의 기쁨은 어디서 왔습니까?
(1) 48절의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는 말씀대로 제자들은 많은 사람들이 믿는 것을 보면서 기뻐했습니다. 부모들은 자식들이 신앙생활을 잘 할 때 기쁨이 옵니다. 저의 기쁨도 우리 교인들이 잘 믿는 것을 볼 때에 옵니다. 반대로 교인들이 주일성수를 하지 않고, 슬슬 잘 빠지고, 이 핑계 저 핑계 대면서 세상길로 갈 때에는 정말 고민이 많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라기는 우리들에게도 이런 영적 기쁨이 넘칠 수 있기를 바랍니다.
(2) 제자들이 가졌던 두 번째 기쁨은 49절에 보니까 주의 말씀이 그 지방에 [두루 퍼지는 것]을 보면서 기뻐하였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이런 것에 관심이 없을 때가 너무 많습니다. 그래서 참 기쁨을 상실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의 이런 기쁨은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는 것을 눈으로 확인하기 때문에 오는 기쁨이었던 것입니다.
(3) 그런데 이상한 것은 50절에 핍박을 받아 쫓겨날 때 제자들은 기뻐하였다고 했습니다. 참 이상하지 않아요? 인정받고, 진급되고, 성공할 때 기뻐한 것이 아니고, 핍박을 받고, 쫓겨날 때에 기뻐하였다고 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것은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고 이 핍박과 쫓겨남이 바로 경건의 증명서가 되기 때문입니다. 또 핍박은 천국에서의 상급에 대한 보증수표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생각컨데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라고 현재의 고난을 감사했던 것입니다.
(4) 52절에 보면 성령이 임하실 때에 기쁨도 충만하였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참 기쁨은 위로부터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기쁨은 성령의 두 번째 선물입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먼저 우리들에게 위로를 주십니다. 구원의 확신을 주시고,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하고 우리를 인도하여 형통케 하십니다. 그래서 참 기쁨을 누리게 하십니다. 믿습니까?
그러면 오늘의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참 기쁨의 비결은 무엇입니까?
먼저 소극적인 방법부터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그것은 [이미 주신 하나님의 은혜와 기쁨을 잊지 않을 때] 기쁨이 계속해서 생깁니다. 반대로 [건망증]은 우리의 참 기쁨을 상실케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은혜는 물에 새기고, 원한은 돌에 새깁니다. 이것이 불행과 슬픔의 원인이 됩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기쁨은 표현할수록 커집니다. 나눌수록 커집니다. 반대로 슬픔은 나눌수록 작아집니다. 그래서 기쁨은 많은 사람들에게 간증하는 것이 좋고, 슬픔은 많은 사람들과 나누어서 기도를 요청하는 것이 좋습니다.
어떻게 우리의 기쁨을 표현해야 합니까? [항상 웃으면서 사는 것]입니다. 웃으면 엔돌핀이 나옵니다. 긴장하거나 슬퍼하면 아드레나린이 나와서 우리들을 더욱 슬프게 만듭니다. 그래서 한국의 속담에 [웃는 집에 복이 온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기도가 영적 건강에 좋듯이 웃음은 신체적 건강에 결정적 역할을 합니다. 웃을 때에는 엔돌핀이 나와서 행복감을 느끼게 하고, 온 몸에 윤활유 노릇을 합니다.
웃음은 아무런 값을 지불하지 않지만 많은 것을 창조합니다. 웃음을 준다고 가난해지지도 않지만 그것을 받는 사람을 풍족하게 만듭니다. 웃음은 잠간 동안 번득이고 지나지만 그 기억만은 영원합니다. 웃음은 사업에도 큰 도움이 되고, 가정의 행복을 창조합니다. 피곤한 사람에게는 안식을 주고, 낙심한 사람에게는 빛을 주고, 슬픈 사람에게는 위로를 줍니다. 또 고통 속에 있는 사람에게는 최고의 해독제가 됩니다. 그래서 일본의 속담에는 “웃음이 명약”이란 말도 있습니다. 자 그러면 이 시간에는 우리의 웃음을 연습하여 보겠습니다. 반갑습니다 하면서 옆에 사람에게 여러분들의 웃음을 보여주시기를 바랍니다. 제가 강아지를 좋아하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그런데 우리 집 강아지는 절대로 웃지를 못합니다. 그냥 꼬리만 흔들고 와서 손을 빨 뿐입니다. 왜냐하면 웃음은 사람만이 가지는 복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웃음을 잃고 사는 사람은 죄송하지만 개처럼 사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날마다 웃음을 잃지 않으면서 살아야 하겠습니다.
[주안에서 살 때에] 기쁨이 넘칩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 “주안에서 기뻐하라”(4:4)고 했습니다. 주안에서 사는 것은 바로 성령 안에서의 삶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9가지 열매 중에서 기쁨은 두 번째 열매가 바로 기쁨입니다.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그런데 성령의 열매를 조사해보면 처음의 세 가지, 즉 사랑과 희락과 화평은 바로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맺혀지는 열매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로 되어야 기쁨이 옵니다.
행복은 어디에 있습니까? [불신] 속에는 행복이 없습니다. 유명한 불신자였던 볼테르는 “나는 차라리 나지 않았더라면 좋을 뻔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행복은 [쾌락]에도 없습니다. 누구보다도 쾌락의 삶을 살았던 바이런 경은 오직 내게는 벌레와 궤양과 슬픔만이 있을 뿐이라고 탄식했습니다. [돈]에도 참 행복은 없습니다. 미국의 백만장자였던 제이 굴드는 죽으면서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이라고 고백을 했습니다. 또 행복은 [지위와 명예]에도 없습니다. 지위와 명예를 가졌던 비콘스필드 경은 “나의 젊음은 실수요, 장년은 투쟁이요, 노년은 후회뿐”이라고 고백을 했습니다. 그러나 참 행복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그래서 빌립보 3장 1절에 보면 [주안에서 기뻐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요즈음 많이 발전하고 있습니다. 어린이를 보고 웃지 않는 것도 폭력이라고 규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기쁨의 표현은 웃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