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회 공과 2012년 12월 28일

바울과 바나바가 이고니온에서 전도하다
사도행전14장1절~7절

이고니온(Ikovnion)은 바울 당시 루가오니아의 수도로써, 요즘으로 말하면 도청 소재지 쯤 되는 곳입니다. 이고니온이란 지명은 “eijkwvn”에서 유래된 말로, “형상, 초상”의 뜻입니다. 요즘 컴퓨터 화면에 사용되는 icon이란 단어가 바로 이 헬라어에서 유래된 말입니다. 아이콘이란 말은 중세 성당 전면에 있는 성화 중에 예수님을 둘러 싼 인물들을 지칭할 때 쓰는 말입니다. 이 말이 이고니온 도시 이름이 된 데는 하나의 전설이 있습니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프로메테우스와 아테나 신이 흙으로 이고니온 사람을 빚고 생명을 불어넣었다고 합니다. 이고니온의 현재 이름은 코냐입니다. 현재의 고냐에는 가장 보수적이고 신비주의적인 회교도들이 모여 살고 있습니다. 이곳 사람들은 종교성이 강하고, 열심이 있습니다. 바울 당시 이고니온은 물이 풍부하여 농사와 상업이 발전되었던 곳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도시가 발달되고, 상업이 발전 된 곳에는 유대인들이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있는 곳에는 회당이 있습니다.
바울은 언제나처럼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에 이고니온에서 두 사도가 함께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 말하니”(1) 회당은 유대인들의 예배당이요, 교육과 집회의 장소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계실 때에 많은 시간을 회당에서 가르치셨습니다.(마4: 23, 9:35, 12:9, 13:54) 사도 바울은 전도 여행 중에 가는 곳마다 먼저 유대인 회당에서 가르쳤습니다.(행9:20, 13:5,14, 17:1,10, 18:4,26, 19:8) 유대인에게 복음을 전하려는 의도에서입니다. 동족 사랑, 동족 구원이 먼저입니다. 비록 유대인들이 훼방하고 박해하고 반대했지만, 바울은 변함없이 유대인을 향했습니다. 바울이 얼마나 동족 전도에 열성적이었는지 보여주는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이방인인 너희에게 말하노라. 내가 이방인의 사도인 만큼 내 직분을 영광스럽게 여기노니, 이는 곧 내 골육을 아무쪼록 시기케 하여 저희 중에서 얼마를 구원하려 함이라.”(롬 11:13-14) 바울은 자신이 이방인의 사도인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방인을 위해서 평생 헌신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마음에는 동족 유대인을 구원하려는 열정이 가득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면서 유대인들이 시기심에서라도 예수를 믿었으면 좋겠다고 행각했습니다. 오늘 북쪽에 있는 우리 동족에게 우리도 그런 마음을 품어야 하겠습니다. 지금은 비록 김일성 사상과 공산주의 사상에 쩔어서 복음을 배척하고 있지만, 언젠가는 주님 앞으로 나아오기를 갈망합니다. 그런 날을 위해서 쉬임없이 기도하고 준비해야 하겠습니다.
바울과 바나바의 전도 결과는 대성공입니다. “유대와 헬라의 허다한 무리가 믿더라.” 깐깐한 유대인들이 믿은 것은 물론, 많은 헬라인들이 복음을 받아들였습니다. 헬라인이란 비유대인, 혹은 이방인의 통칭입니다. 이방인들이 유대인 회당에서 예수를 믿기 시작한 것은 의미가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바라신 결과입니다. 하나님은 유대인과 이방인이 다 구원받는 것을 원하십니다. 특히 헬라인(이방인)이 구원받은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목표는 믿지 않는 모든 사람들, 이방인들의 구원입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저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 하시 도다.”(롬10:12)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 하시느니라”(딤전2:4)

1.복음을 반대하는 사람들의 악행3가지는?

바울의 전도가 성공을 거둘 때에 반대자들이 나타났습니다. 복음 전파가 있는 곳에 반드시 일어나는 결과입니다. 진리가 전파되는 곳에 사탄의 역사도 강하게 나타납니다. “그러나 순종치 아니하는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의 마음을 선동하여 형제들에게 악감을 품게 하거늘,”(2)
박해의 시작은 유대인들입니다. 바울의 동족입니다. 바울이 가슴에 품고 사랑한 사람들입니다. 자기 목숨을 내 걸고 구원하려 한 사람들입니다. 유대인들은 구약 성경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메시아를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막상 메시아가 나타났을 때는 일제히 거부했습니다. 인간의 악한 본성과 마귀의 역사 때문입니다.
그들은 세 가지 악한 일을 했습니다.
첫째로 순종치 않았습니다.성경에 명령한 메시아의 말씀을 듣지 않았습니다.
둘째로, 선동했습니다. 사람들을 격동하고 흥분시켰습니다.
셋째로, 악감을 품게 했습니다. 해를 끼치고, 악한 영향을 미쳤다는 뜻입니다. 이런 복음에 대한 반대의 역사는 현재에도 동일하게 일어납니다. 나라의 운명이나 형편을 바꾸는 것은 민중이 할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 사항입니다. 개인이든 국가든 그 운명을 결정하고 심판하는 것은 하나님의 몫입니다. 믿음 없는 세상 사람들이야 어떻게 생각하든지,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그렇게 믿고, 그렇게 행동해야 합니다. 어찌 되었든지 사람을 격동하고 악감을 품게 하는 것은 악한 영의 조종입니다. 마귀의 본업은 정죄하고 참소하는 일입니다. “내가 또 들으니 하늘에 큰 음성이 있어 가로되 이제 우리 하나님의 구원과 능력과 나라와 또 그의 그리스도의 권세가 이루었으니 우리 형제들을 참소하던 자 곧 우리 하나님 앞에서 밤낮 참소하던 자가 쫓겨났고”(계12:10) 불신앙의 세계는 마귀에게 지배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박해하는 사람들을 미워할 것이 아니라, 그 배후에서 역사하는 마귀를 미워하고 대적해야 합니다.
유대인들의 적대적 행동은 이방인들까지 끌어들였습니다. “이방인과 유대인과 그 관원들이 두 사도를 능욕하며 돌로 치려고 달려드니,”(5) 마귀의 목표는 성도들과 교회를 파괴하는 일입니다. 반대자들의 행동을 보세요. 그들은 사도들을 모욕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이들에게 폭력을 행하고, 무례히 행하고, 오만하고, 수치를 주었습니다. 복음 맡은 자들의 인격을 모욕하고 수치심을 갖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필경은 돌로 쳐 죽이려고 했습니다. 로마 제국에 복음을 전한 최초의 사람들은 300년 동안 무수히 목숨을 잃었습니다. 굶주리고, 화형 당하고, 사자 밥이 되고, 십자가에 매달리고, 목 베임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명심할 것이 있습니다. 기독교 역사에서 반대는 항상 있어 왔다는 사실입니다. 본문에 보세요. “그 성내 무리가 나뉘어 유대인을 좇는 자도 있고 두 사도를 좇는 자도 있는지라,”(4) 영접하는 자가 있으면 반대자도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인류 역사입니다. 에덴에서 계시록의 종말에 이르기까지, 마귀는 온갖 방법으로 하나님을 반대해 왔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반대 속에서 위축되지 말고 도전하고 이겨야만 합니다. 반대를 이기지 못하는 자는 결코 세상에서 영혼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2. 반대자들에 대해서 사도들은 어떤 대응을 했을까요?

첫째로, 오래 머물렀습니다.

“두 사도가 오래 있어 주를 힘입어 담대히 말하니”(3상) 이고니온에 오래 머물렀습니다. 이고니온이 어떤 곳입니까? 순종하지 않는 사람들, 선동하는 사람들, 악감을 품게 하는 사람들, 모욕 주는 사람들, 돌로 치려는 사람들이 있는 곳입니다. 그런 곳에 사도들은 지속적으로 머물렀습니다. 왜냐하면 그 곳에 하나님이 구원하시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사도들로 하여금 미워하는 사람들 속에 오래 머물게 하셨습니다. 그래야 하나님 사랑을 보여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반대자들이 많다 해서 쉽게 포기하거나 떠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할 수만 있다면 오래 머물면서 주님의 사랑을 보여주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둘째로, 주님을 힘입어 담대히 말했습니다.

“주을 힘입어”(ejpi; tw’/ kurivw)라는 말은 “주님 안에”(in the Lord)라는 뜻입니다. “담대히 말하다”(parrhsiavzomai)는 말은 자유롭게 말하다, 드러내어 말하다(speak freely, speak openly)라는 뜻에서 담대히 말하다(speak boldly)는 의미로 발전한 말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진정한 자유는, 마귀에게 매이지 않고, 사람에게 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말하고 행동하는 자유입니다. 이 자유는 오직 주님께 매이고, 주님께 순종할 때 얻어집니다. 또한 이 자유함 속에 있는 자는 세상에서 가장 담대해 집니다. 이것이 바로 사도들의 행동 원리입니다. 순교자가 된 사도들을 보세요. 스데반, 베드로, 바울, 우리 주님까지, 모두가 하나님 안에 머물면서 하나님 말씀을 자유롭게 전했습니다. 여러분! 정말 자유인이 되고 싶으세요? 그렇다면 오직 주님께 매이시기 바랍니다. 주님께만 매이고, 주님이 명하신 것을 거리낌 없이 행하세요. 그러면 세상에는 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됩니다. 죄로부터 자유롭습니다. 죄 짓지 않는 자유를 누립니다. 욕망으로부터 자유롭습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이 주시는 영적인 자유입니다. 영혼이 매이지 않을 때, 가장 자유롭습니다. 우리는 바로 이 자유를 마음껏 누려야 합니다.

셋째로, 주께서 대단한 결과를 주셨습니다.

“주께서 저희 손으로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여 주사 자기 은혜의 말씀을 증거하시니,”(3하) 주께서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여 주셨습니다. 기적을 일으켜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기적을 사도들의 손으로 행하게 하셨습니다. 능력은 공급해 주시되, 그 능력을 외부적으로 나타나게 하실 때는 사도들의 손을 사용하셨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사도들의 권위를 한껏 높여주셨습니다. 다음 장면에 보면 사도들이 걷지 못하는 사람을 일으키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때에 사람들은 바울과 바나바를 제우스와 헤르메스 신으로 생각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주님의 명령대로 행한다면 얼마든지 신적인 권세를 나타나게 하시고, 사람들 앞에서 높아질 줄 믿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목표는 사도를 높이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목표는 어디까지나 복음을 증거 하는 데 있습니다. 기적의 목표도 기적 자체에 있지 않습니다. 그 기적을 통해서 주님이 구주이심을 증거 하는 데 있습니다. 주님은 바울과 바나바를 통해서 은혜의 말씀을 증거케 하셨습니다. 주님의 말씀, 은혜의 말씀을 증거 하라! 그것이 주님의 목표입니다.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벧후 3:9,15) 만일 오늘 내가 헌신한다면 주님은 나를 통해서 표적과 기사로 능력을 행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나를 통하여 은혜의 말씀을 증거 하게 하실 것입니다.

3. 반대자들의 박해도 계속되었으나 복음 전파는 중단되지 않았습니다.

이고니온 전도가 최종적인 벽에 부딪쳤을 때에 사도들은 이웃 도시로 장소를 옮겼습니다. 그곳 역시 반대자들이 있고, 박해도 계속되었습니다. 그러나 전도는 중단되지 않았습니다. “저희가 알고 도망하여 루가오니아의 두 성 루스드라와 더베와 및 그 근방으로 가서, 거기서 복음을 전하니라.”(행14:6-7) 지금도 하나님의 전도는 계속됩니다. 안디옥, 구브로, 비시시아 안디옥, 이고니온, 루스드라, 더베, 에베소, 골로새, 빌립보, 데살로니가, 고린도, 아테네, 로마, 서바나, 북유럽, 동유럽, 신대륙, 아시아…. 전도는 우리 성도들이 살아 있는 한 계속되는 주님의 역사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전도하라고 하면 몹시 부담스러워 합니다. 선교사로 나가지 못한 것에 대해서 미안해하고, 예수는 구주라고 말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 미안해 하고, 이웃을 구제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 미안해하고, 뭔가 교회 일을 하지 못하고, 봉사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 미안해합니다.
전도는 이런 것들이 아니라 주님을 보여주는 삶 자체입니다. 우리가 날마다 주님과 함께 사는 모습! 내 식탁에 임하시는 주님, 내 침상에 임하시는 주님, 내 일터에 임하시는 주님, 내가 길을 행할 때에 임하시는 주님, 내가 말하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모든 때에 주님과 교제하는 모습을 보기만 하면 됩니다. 반대자가 있는 없든, 주님과 함께하는 삶은 계속됩니다.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성경이 보여주는 참 성도의 삶이 뭡니까? 그것은 바로 주님과 동행하는 삶입니다. 에녹처럼, 노아처럼, 아브라함처럼, 다윗처럼, 사도들처럼 하나님과 동행할 때에 내 삶을 통해서 모든 사람들이 주님의 모습을 보게 될 것입니다. 물론 이런 삶의 과정을 통해서 주님은 은혜의 말씀을 증거 할 기회를 주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