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회 공과 2012년 1 월 18일

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 와서 일으킨 사건
사도행전14장19절~28절

오늘도 루스드라에서 일어난 사건을 중심으로 말씀을 공부하겠습니다. 루스드라에서는 두 가지 극적인 사건이 있었습니다. 첫째는 걷지 못하는 사람을 일으킨 기적입니다. 그 내용은 지난주간에 공부 하였습니다. 바울이 돌에 맞아 죽었다가 다시 일어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와서 무리를 충동하니 그들이 돌로 바울을 쳐서 죽은 줄로 알고 시외로 끌어 내치니라.”(19)

1.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은 봉변과 죽음을 당합니다. 이것의 의미는?

루스드라에서바울은 끔찍한 봉변을 당하였습니다. 루스드라는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160 km나 떨어진 곳입니다. 서울서 대전 정도의 거리입니다. 당시는 고속도로도 없고 교통수단도 없던 시절입니다. 반대자들은 이 먼 거리를 단숨에 쫓아 왔습니다. 말을 타거나 도보로 걸어서 상당히 여러 날 걸려서 왔을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복음에 대해서 얼마나 큰 반감을 품었는지, 혹은 얼마나 집요하였는지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그들은 복음을 반대하기 위해서라면 세상 끝까지라도 달려 갈 태세였습니다. 바울도 한 때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바울 역시 예루살렘에서 다메섹까지 예수 믿는 사람을 붙잡아 죽이려고 쫓아갔습니다.
유대인들은 주변 사람들을 선동했습니다. 분별력이 없는 군중들은 유대인들의 선동에 좌우를 분별치 못하고 돌을 던졌습니다. 이상한 것은 무리들의 행동입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바울과 바나바를 제우스와 헤르메스 신이라고 하면서 엎드려 절하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 바울을 향해 돌을 던졌습니다. 예수님을 향해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던 군중들과 모양이 똑같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나귀 타고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오실 때에 옷을 벗어 길에 깔고, 종려 가지를 흔들면서 호산나를 외치면서 환영했습니다. 그러나 사흘이 지나지 않아 돌변했습니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쳐댔습니다. 요즘도 그런 것 같습니다. 세상 군중들의 여론이란 오뉴월 보리밥처럼 쉽게 변질됩니다. 단 며칠 사이로 좋아하다가 싫어하다가 합니다. 이런 여론을 믿고 정치를 한다면 정말 한심한 일입니다. 만일 광야 시절의 모세가 여론을 따랐다면 가나안으로 가지 못하고 애급으로 되돌아갔을 겁니다. 유대인들은 어리석은 군중들을 선동했습니다. 군중들은 바울을 향해 돌을 던졌습니다.
마침내 바울은 쓰러졌습니다. 사람들은 바울이 죽은 줄 알고 성 밖에 내다 버렸습니다. 바울을 죽인 사람들은 일말의 양심의 가책도 받지 않았습니다. 죄의식도, 어떤 긍휼도, 책임감도 없었습니다. 요즘 그렇게 인권을 외치고 민주주의를 외치는 사람들이 북한 정권이 수많은 백성을 굶어 죽이는 데 대해서는 입을 다물고 있는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그들은 마치 정의의 사도인양 행세하지만 또 다른 인권에 대해서는 꿀 먹은 벙어리입니다. 바울이 돌에 맞아 죽을 당시와 똑 같은 일이 최근에도 벌어졌습니다. 2007년 4월 18일 수요일‘말라티야’라는 터키의 중동부 지방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오래 전부터 터키에서 사역을 하고 있던 독일 출신 틸~만 선교사와 현지인 네자티와 우르가 무참히 칼에 찔리고 난자당하여 죽임을 당했습니다. 틸만 선교사는 당시 나이 46세로 세 자녀와 아내와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네자티는 37세로 예수님을 영접한지 7년이 된 신실한 신자였고, 우르는 32세의 미혼으로 믿은 지 2년이 되는 신자였습니다. 다섯 명의 범인들은 19세 20세의 대학생들입니다. 이들은 이슬람과 터키를 지킨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범행을 저질렀습니다. 이들은 사전에 치밀한 계획을 세웠습니다. 예수를 믿는 것처럼 위장하여 교회에 침투하여 얼마간 함께 했습니다. 그러다가 범행 당일 사무실에 침입하여 틸만 선교사님과 두 현지인을 붙잡아 결박했습니다. 그들은 수건으로 입을 막고, 손가락을 칼로 자르면서 협박했습니다. 예수를 부인하고 알라 앞에 무릎을 꿇으라! 이를 거부하자 온 몸을 칼로 찔렀습니다. 입과 항문 코를 칼로 찢고 흘러나온 창자를 칼로 잘랐습니다. 그러면서 태연하게 이 장면을 촬영했습니다. 틸만 선교사님은 156군데를 칼에 찔려 순교했습니다. 네자티와 우르 역시 무수히 찔려 죽었습니다. 이 사건이 전 지역에 보도된 후에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스스로 자신을 드러냈습니다. 이들의 장례식에 당당히 참석하여 무언의 시위를 했습니다. 틸만 선교사님의 아내인 수잔나는 딸 미카엘(13), 미리암(8), 아들 루카스(11)와 함께 터키의 ATV에 나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범인들을 용서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정말로 무엇을 했는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십자가에서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 함이니 이다.!”(눅23:34)

복음은 어디서나 환영하는 사람도 있지만 반대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반대가 무서워서 복음을 전하지 못한다면 마귀에게 지는 겁니다. 왜냐하면 복음을 가로막는 것은 근본적으로 사람이 아니라 사람을 지배하는 마귀이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지금도 복음을 전하지 못하도록 온갖 수단을 다 동원합니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벧전5:8) 주님은 자기 종들에게 복음을 전하면서 고난을 당하리라고 예언하셨습니다. 왜 고난을 당해야 하는가? 그냥 순탄하게 복음을 전할 수는 없는가? 굳이 고난을 통해서 복음을 전파하게 하신 이유가 있습니다. 고난을 통해서 복음은 오히려 확실하게 전파되고 증거 되기 때문입니다.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 사람들을 삼가라 저희가 너희를 공회에 넘겨 주겠고 저희 회당에서 채찍질 하리라. 또 너희가 나를 인하여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리니 이는 저희와 이방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마10:16-18) 오늘 복음 때문에 반대에 직면해 있습니까? 반대 정도가 아니라 망신을 당하고 봉변을 당하지는 않았나요? 그렇다면 이상하게 생각지 마시고, 오히려 지극히 정상임을 아시고 소망을 가지세요. 왜냐하면 복음은 반대 속에서 오히려 더 강력하게 전파되기 때문입니다.

2. 다시 일어난 바울을 보면서 우리는 무엇을 생각해야 할까요?

돌에 맞아 죽은 바울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제자들이 둘러섰을 때에 바울이 일어나 성에 들어갔다가”(20상) 바울은 다시 일어났습니다. 일어나다는 말(ajnivsthmi) 앉았던 자리에서 일어난다는 의미도 있고, 죽음에서 일어난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양쪽을 다 의미합니다. 바울은 죽음에서 살아났고 넘어진 자리, 버려진 자리에서 다시 일어났습니다. 돌로 치던 자들은 죽은 것을 확인하고 성 밖에 내다버렸습니다. 제자들 즉, 믿는 사람들은 바울의 시신을 어떻게 처리할까 하여 둘러 서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갑자기 일어났습니다. 기절했다가 일어났다 해도 무수한 돌에 맞아 넘어졌던 사람이 그렇게 쉽게 일어나서 거동할 수는 없습니다. 만일 죽었었다면 더더욱 사람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깨어났고 일어났습니다. 바울 스스로 일어난 게 아니라 주님이 일으키셨습니다. 성령께서 바울에게 생명을 주시고 힘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는 일어나자마자 성에 들어가 다시 복음을 전했습니다.
주님은 복음의 일군이 맞아 죽도록 놔두지 않으십니다. 다시 일으키십니다. 바울은 자신이 복음 전하는 것 때문에 얼마나 많은 고난을 겪었는지 고난의 목록을 기록했습니다. “저희가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 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도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 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고후11:23-27) 바울이 이 고난의 목록을 기록한 목적이 뭡니까? 내가 이렇게 많은 고생을 했었노라고 알리자는 뜻입니까? 아닙니다. 바울은 자신이 얼마나 많은 고생을 했는지 알리려고 이 목록을 기록한 것이 아닙니다. 이 많은 고난에도 불구하고 다시 일어났으며, 자신이 결코 패배하지 않았음을 강조하려 한 것입니다. 보십시오. 나는 이 엄청난 반대와 시련, 고통 중에서 한 번도 패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나는 이겼습니다! 나는 승리했습니다! 주님이 나를 도와주셨습니다! 이런 고백입니다.
주의 일을 하고 있습니까? 안심하세요. 주님께서 신분보장을 확실하게 해 주십니다. 천하에 그 어떤 사람이나 세력도 주님의 일을 하는 사람을 넘어뜨리지 못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주님이 친히 나를 일군으로 뽑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냥 뽑아 놓으시고 가만히 계시지 않습니다. 하나님 우편에서 나를 위해 기도하고 계십니다. 때때로 내가 지극히 힘든 상황에 빠지면 주님도 그 자리에서 일어나 더욱 나를 격려하십니다.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 대”(행7:55-56) 주님은 내가 주님의 일을 마칠 때까지 시종 함께하십니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28:20)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아무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시더라”(행18:10) 주님이 나를 붙들고 계십니다.
주 안에서 다시 일어나세요. 주님을 만난 사람마다 일어났습니다. “그의 손을 만지시니 열병이 떠나가고 여인이 일어나서 예수께 수종들더라”(마8:15)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그가 일어나 집으로 돌아가거늘”(마9:6-7) “무리를 내어 보낸 후에 예수께서 들어 가사 소녀의 손을 잡으시매 일어나는지라”(마9:25) “예수께서 아이의 손을 잡고 불러 가라사대 아이야 일어나라 하시니, 그 영이 돌아와 아이가 곧 일어나거늘 예수께서 먹을 것을 주라 명하신대,”(눅8:54-55) “예수께서 저희 생각을 아시고 손 마른 사람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한가운데 서라 하시니 저가 일어나 서거늘”(눅6:8) “가까이 오사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죽었던 자가 일어 앉고 말도 하거늘 예수께서 그를 어미에게 주신대”(눅7:14-15) 병상에서 일어났습니다. 불구에서 일어났습니다. 낙심 절망에서 일어났습니다. 관에서 일어났습니다. 무덤에서 일어났습니다. 무기력한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사람의 힘으로 일어난 게 아닙니다. 인간적인 의지로 일어난 게 아닙니다. 우연한 기적으로 일어난 게 아닙니다. 오직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일으키심으로 다시 일어났습니다. 주님은 오늘 우리를 일으키실 의지와 뜻이 있으십니다. 주님께서 일으키십니다. 일어나세요. 모든 환난의 자리에서 일어나세요. 모든 사람들이 죽은 줄 아는 상황에서, 모든 사람들이 죽었다고 판단하는 자리에서 다시 일어나세요. 주님이 일으키십니다. 복음을 위해서 용기 백배 하여 일어나야 합니다.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3. 무엇을 위하여 전도는 계속 되어야 합니까?

이 말씀의 결론은 복음 전도입니다. 세상에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모르는 사람들이 수없이 많고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할지를 모르며 방황 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기에 또 무엇을 위하여 왜 사는지를 모른 사람들이 대분이기에 어떤 상황이 벌어지든지 복음 전도는 계속됩니다. 그것이 주님의 뜻입니다. “제자들이 둘러섰을 때에 바울이 일어나 성에 들어갔다가 이튿날 바나바와 함께 더베로 가서,(20) 복음을 그 성에서 전하여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고”(20-21상) 우리의 관심은 바울의 고난에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관심은 복음 전도에 있습니다. 우리는 바울이 얼마나 많은 시련과 고난을 겪었는지 알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복음이 얼마나 잘 전파되었는지 관심이 있으십니다.
바울은 돌에 맞아 죽었다가 다시 일어나 루스드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바로 더베로 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돌에 맞아 죽었었으면 이제는 그만 해도 누가 뭐라고 할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바울은 다시 전도를 시작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것이 바로 주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바울을 뽑으실 때부터 그런 계획으로 뽑으셨습니다. 본래 바울은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 죽이러 다니던 사람입니다. 그는 예루살렘에서 다메섹까지 예수 믿는 사람을 잡으러 갔습니다. 직선거리로 215km, 굽은 길로 가면 300km나 되는 먼 거리입니다. 열심히 특심했습니다. 그런 바울을 부르신 주님께서는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일에 그런 열심을 내게 하셨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만난 이후 약 30여년 이상을 오직 복음 전하는 일에 헌신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는 예수님을 전하기 위해서 목 베임을 당했습니다. 주님은 바울을 사랑하시는 것 이상으로 세상 죄인들을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그들을 부르시는 일에 가장 아끼는 종이라도 죽게 하셨습니다.
보세요. 더베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비시디아 안디옥, 이고니온, 루스드라에서 일어난 반대자들의 폭력이 더베에서는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순순히 복음을 전할 수 있었고, 복음을 받아들였습니다. 돌에 맞고도 다시 일어난 바울을 또다시 돌에 맞게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이것이 복음 전도의 즐거움입니다. 많은 시간 반대자들에게 시달리며 복음을 전했지만, 때로는 평온한 중에 복음을 전할 때도 있습니다. 그래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할렐루야! 더베 전도의 소중한 열매가 또 있습니다. 바로 여기서 가이오와 데모데를 얻은 일입니다. “아시아까지 함께 가는 자는 베뢰아 사람 부로의 아들 소바더와 데살로니가 사람 아리스다고와 세군도와 더베 사람 가이오와 및 디모데와 아시아 사람 두기고와 드로비모라”(행 20:4) 돌팔매질을 두려워 않고 전도한 결과 더베의 열매를 얻었습니다.
지금도 주님의 부르심과 구원은 계속됩니다. 특히, 주님은 사랑하시는 제자들을 통해서 사람들을 부르십니다. 복음은 많은 곳에서 반대에 부딪칩니다. 전도자들은 매를 맞고 감옥에 갇히기도 합니다. 돌에 맞아 죽고, 목베임을 당합니다. 오늘날에서 지구상 곳곳에서 복음 전파를 하다가 죽임을 당합니다. 아프가니스탄에서, 예멘에서, 이라크에서, 인도네시아에서, 중국에서 북한에서 순교의 피를 흘리고 있습니다. 이 순교의 피를 통해서 주님은 영혼들을 부르시고 구원하십니다.
우리 믿음의 선배들도 과거에 이런 순교자들을 통해서 복음을 전해 받았습니다. 우리들 역시 반대를 두려워하지 않는 전도자들 때문에 예수님을 구주로 믿게 되었습니다. 주님은 지금도 많은 사람들을 통해서 복음을 증거 하십니다. 주님은 오늘 내가 그 역할을 감당하기를 원하십니다. 지금 내 주위에 어떤 사람들이 있습니까? 그들은 구원 받아야 될 사람들이 아닙니까? 반대를 두려워 말고 복음을 전합시다. 주님은 나를 택하셨습니다. 그리고 나를 보내셨습니다. 불신 가정 속에 보내셨습니다. 불신 직장에 보내셨습니다. 불신 친구들 속에 이웃들 속에 보내셨습니다. 이제 담대히 증거 하세요. 혹시 예수 믿는 것 때문에, 예수님을 전하는 것 때문에 고생하고 계십니까? 용기를 내세요. 주님이 함께하십니다. 반드시 열매를 주십니다. 기대하세요. 주변 사람들이 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천국 백성이 되는 날을 바라보세요. 주님은 오늘 내가 어떤 고난을 당할지라도 참고 견디면서 다시 일어나 복음을 전하기를 원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