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회 공과 2013년 3월 8일

바울과 실라가 잡히다.
사도행전16장19절~40절

스가랴4:6 “그가 내게 일러 가로되 여호와께서 스룹바벨에게 하신 말씀이 이러하니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 학식, 지위, 권세, 기술, 재주 등은 우리를 행복으로 이끌지 못합니다. 여기에는 영적 비밀이 들어 있습니다. 세계적인 역사 연구가인 아놀드 토인비 박사는 인류 역사에는 21개 문명이 있는데 그중 3개정도 남고 그 찬란했던 나머지 문명은 모두 자멸하였다는 것입니다. 이유는 문명을 지탱하는 것이 외적인 환경에 있지 않고 문명 속에 살아가는 영적인 것에 의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문명이나 환경이 인간을 행복하게 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지키고 구원하는 것은 영적인 능력에 있습니다. 이것에 따라 문명도 결정되는 것입니다. 은 사도바울이 아시아로 가려다가 기도 중에 유렵에서 손짓하므로 간 첫 지역이 빌립보 지역이었습니다. 그곳에서 점치는 귀신을 좆아 내어 그 일로 감옥에 갑니다. 그곳에 간수가 구원받고 빌립보 교회가 세워지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1.간수가 자다가 깨어 어떤 행동을 취하게 됩니까?

바울과 실라가 옥중에서 찬송하고 기도 할 때에, 지진이 나고 옥문이 열렸습니다. 오늘은 거기에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간수가 자다가 깨어”(27) 우리도 지진을 느껴 본 적이 있습니다. 작은 진동임에도 약간의 어지러움을 느낄 정도였습니다. 옥문이 열릴 정도의 지진이라면 머리 속까지 흔들렸을 겁니다. 문득 잠에서 깨어난 간수는 먼저 죄수들부터 생각했습니다. 죄수들이 어찌 되었나? 아뿔싸! 이게 웬 일입니까? 문이 열려져 있습니다. 감옥 안에서 문이 있는 방향으로, 약간의 빛에도 문이 열린 것이 실루엣으로 나타났습니다. 물론 감옥 안쪽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간수는 일단 죄수들이 도망친 것으로 판단했습니다. “옥문들이 열린 것을 보고 죄수들이 도망한 줄 생각하고 검을 빼어 자결하려 하거늘”(27) 간수는 죄수를 놓침으로써 받는 처벌이 두려웠습니다. 사도행전 12장에 보면 헤롯 아그립바 1세는 베드로를 놓친 간수들을 즉시 처형했습니다. 간수는 칼을 빼어 자신을 찌르려고 했습니다. 당시에는 흔한 자살 방법입니다. 그러나 자결하려는 행동은 너무 성급한 것이었습니다. 죄수들은 그대로 있었고, 천재지변으로 문이 열린 것이니, 자결할 만 한 상황은 전혀 아니었습니다. 아무리 다급한 사건이 일어난다 해도 먼저 목숨을 끊어서는 안 됩니다. 목숨을 끊으면 인생의 모든 기회가 상실됩니다.
이런 다급한 상황에서 바울이 소리쳤습니다. “바울이 크게 소리질러 이르되 네 몸을 상하지 말라 우리가 다 여기 있노라 하니”(28) 마치 모리아 산에서 칼을 들어 이삭을 찌르려고 할 때에 들려온 하나님의 음성과 같습니다. 네 몸을 상하지 말라! 성경 전체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스스로 자신을 손상시켜서는 안 됩니다. 육체적으로 자신을 손상시키는 일이나, 정신적으로 자신을 학대하는 일이나 마찬가집니다. 스스로 자기 몸에 육체적인 손상을 입히지 마세요. 자살, 자해, 해로운 음식, 위험한 모험, 등등. 영적인 손상을 입히는 것도 마찬가집니다. 자신을 학대하는 일, 자기 비하, 자기 멸시, 자신의 존재 가치 부정, 등등. 자신을 손상시키지 마세요. 이런 행위는 하나님 앞에 죄악입니다.

2.바울에게 외친 간수의 질문을 설명하여 봅시다.

바울의 목소리를 들은 간수는 즉시 등불을 찾아 감옥 안으로 뛰어 들어갔습니다. “간수가 등불을 달라고 하며 뛰어들어가”(29) 죄수들을 살피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이 순간 죄수들이 도망치든지 말든지 그것이 관심사가 아니었습니다. 간수는 오직 바울과 실라의 존재에 압도되었습니다. “무서워 떨며 바울과 실라 앞에 엎드리고, 저희를 데리고 나가”(29,30) 간수는 무서워 떨며 바울과 실라 앞에 엎드렸습니다.
간수가 무서워 떤 것은 지진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느낄 때 나타나는 두려움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했던 모든 사람들이 이렇게 두려워했습니다. 야곱(창28:17), 기드온(삿6:22), 마노아(삿13:22), 이사야(사6:5), 베드로(눅5:8)까지. 바울이 점치는 귀신을 쫓아내던 일, 그 일로 말미암아 매를 맞고 감옥에 갇힌 일, 감옥에서도 찬송하고 기도하던 일, 그리고 지진이 일어나고, 옥문이 열리고, 죄수들은 꼼짝도 않고 그냥 앉아 있는 일까지. 간수는 과연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에 갑자기 두려워졌습니다. 여기 있는 바울과 실라는 정말 그 두려우신 하나님의 종들이 아닌가!
간수는 바울과 실라를 내실에서 데리고 나갔습니다. 어디로 나갔는지 모릅니다. 아마 자기 거처까지 데리고 나갔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신분상 죄수였던 바울과 실라 앞에 엎드렸습니다. 이런 행동은 분명히 간수로서 죄수에게 할 행동은 아닙니다. 그러나 간수는 이미 육신적인 생사문제를 초월하여 하나님의 능력 앞에 순종하고 있었습니다. 간수는 일생일대의 가장 중요한 질문을 합니다. “선생들이여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 하거늘”(29) “선생들이여”란 말은 직역하면 “주인들이여”라는 뜻입니다. 주인들이여! 노예가 상전을 부르는 말입니다. 간수는 바울과 실라에게서 하나님의 권세를 느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상관이나, 로마 총독에게 느끼는 느낌과는 전혀 다른 영적 느낌이었습니다.
간수는 구원 문제를 물었습니다. 여기서 그가 말한 구원은 육신적이거나 세상적인 구원이 아님은 분명합니다. 그는 외적으로 어떤 다급한 구원 문제도 없었습니다. 죄수들이 도망치지 않았으니 죄수에 대해서 문책 받을 일이 없습니다. 감옥 문이 망가진 것은 천재지변이니 책임 질 일도 아닙니다. 간수가 외친 구원은 분명히 하나님과 관련된 영적 구원이었습니다. 간수는 왜 이 순간 영적 구원에 대해서 질문을 했을까? 어떤 주석가는 앞서서 점치는 귀신 들린 여인이 거리에서 외친 내용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 여자가 뭐라고 외쳤습니까?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행16:17) 이 간수가 여인의 외침을 들었는지는 확실치 않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간수 스스로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죄인임을 느끼고 어떤 구원의 필요성을 느꼈다고 합니다. 타의로 느꼈든지 스스로 느꼈든지 상관이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구원 문제에 대한 질문을 했다는 점입니다.
내가 어떻게 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는가? 이 질문은 인간이 세상에 태어나서 죽기 전에 반드시 물어야 되는 최고, 최대의 질문입니다.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구원을 필요로 하는 존재입니다. 구원 받지 않으면 절대로 안 되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을 반역한 범죄자입니다.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습니다. 지옥의 형벌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두려워 떨며 이 질문을 해야 합니다. 누구든지 하나님 앞에 서지 않으면 자신이 죄인인 것을 모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자신을 세워야 합니다. 그리고 성경 말씀처럼 내가 얼마나 죄인인지 직시해야 합니다.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 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저희가 이 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하다고 하나님의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 일을 행하는 자를 옳다 하느니라.”(롬1:28-32) “죄의 삯은 사망이요“(6:23)
간수는 구원에 관한 질문을 하면서 “내가 어떻게 하여야?”라고 물었습니다. 그는 구원의 조건으로 무엇을 행해야 되는가를 묻고 있습니다. 보편 종교의 질문입니다. 내가 어떻게 함으로써 구원 받을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즉, 어떤 선행을 해야 하는가? 어떤 고행, 수련, 수행을 해야만 하는가? 뭔가 해야만 한다는 것, 뭔가 죄 값을 갚아야만 된다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잘 못 된 질문입니다. 구원은 무엇을 행함으로써 얻어지는 대가성의 것이 아닙니다. 거저 주시는 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3. 간수의 질문에 대한 바울의 답은?

무엇을 행하면 구원을 얻겠느냐는 질문에 대해서 바울은 전혀 다른 대답을 합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이르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고, 주의 말씀을 그 사람과 그 집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전하더라.”(31-32) 간수는 “무엇을 행하여야”라고 물었고, 바울은 “믿으라!”고 명령합니다. 실로 죄인의 구원은 무엇을 행함이 아닌 믿음으로 얻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믿음으로 얻는 구원에 대해서 바울은 아주 명쾌한 설명을 합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갈 2:16) 만일 인간이 자신의 죄 값을 무슨 행동으로 갚을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갚으라고 하실 겁니다. 그러나 인간의 죄는 무슨 행동으로 갚아질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사기꾼이 크게 사기를 쳐서 남의 재산을 축내고 남의 가정을 파괴하기까지 했습니다. 이런 사람의 죄를 몇 가지 선행이란 명분으로 해결 되겠습니까? 최근 어린 여아를 욕보여서 불구를 만든 사람에게 징역 12년이 선고된 것을 놓고 비난이 등등합니다. 남의 신세를 망쳐 놓고 겨우 12년 감옥살이 하는 것으로 배상이 되겠습니까? 사람 죽여 놓고 평생 고행을 한다고 죽은 사람이 살아납니까? 더구나 죄는 인간을 향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해결해 주시지 않는 한 해결되지 않습니다.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을 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죄 값을 인간이 갚을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죄는 용서해 주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인간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해법은 용서입니다. 세상 법도 마찬가집니다. 사형수가 살아날 길은 무슨 자선 사업이나 선행이 아닙니다. 대통령의 사면 복권만이 살아날 수 있는 유일의 길입니다. 하나님은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하면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해 주십니다. 영생을 주십니다. 천국을 보장하십니다. 하나님 자녀로서의 신분과 모든 특권을 회복해 주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주신 구원입니다. 바울은 간수에게 명령합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간수는 바울과 실라를 ‘선생들’(성경원어는“주인들”이란 뜻임)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예수님을 “주”라고 불렀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 세상에 보내신 구원자는 오직 한 분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습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행 4:12) 인간에게 구원의 주는 오직 한 분 예수님뿐입니다.
구원은 즉각적으로 나타납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는 순간 이미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됩니다. 예수님 한 편에서 사형당한 사형수는 예수님을 영접한 즉시 하나님 자녀가 되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눅 23:43) 간수는 밤중에 온 가족과 함께 모여 바울이 전하는 구원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일시에 주님을 영접했습니다. 간수와 그 가족들은 즉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 그들은 구원받은 즉시 세례를 받았습니다. 하나님 자녀가 되었음을 안팎으로 공표했습니다. 그는 이제 로마 시민권자로서가 아니라, 천국의 시민권자로서 당당한 삶을 시작했습니다. “그 밤 그 시각에 간수가 저희를 데려다가 그 맞은 자리를 씻어주고 자기와 그 온 가족이 다 세례를 받은 후” (33) 바울은 간수의 영혼을 씻겨주고, 간수는 바울의 몸을 씻겨주었습니다. 신령한 소통의 모습이었습니다.

4. 바울이 전한 복음으로 간수는 어떻게 변화 되었습니까?

주님을 영접하면서 간수에게 다양한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우리는 이 변화에 주목해야 합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삶에 변화가 일어나는 것은 당연합니다. 내적인 변화에서부터 외적인 삶의 변화까지, 즉각적 변화에서 점진적인 변화까지 다양한 변화가 일어납니다. 우선 간수의 변화를 봅시다. “그 밤 그 시각에 간수가 저희를 데려다가 그 맞은 자리를 씻어주고 자기와 그 온 가족이 다 세례를 받은 후, 그들을 데리고 자기 집에 올라가서 음식을 차려 주고 그와 온 집안이 하나님을 믿으므로 크게 기뻐하니라.”(33-34)

첫 번째 변화는 자유인이 된 것입니다.

간수의 행동을 보세요. 그는 간수로서 상관들에게 받을 문책에 대해서 전혀 개의치 않습니다. 감히 죄수를 풀어주고, 그 죄수 앞에 무릎을 꿇고,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가서 대접을 하고, 그들이 전하는 설교를 들었습니다. 그것도 그 혼자만이 아닌 온 집안 식구들이 다 함께! 간수는 이미 영적으로 주님을 만남으로 자유를 얻고 있습니다. 주님께 매인 자는 세상 모든 매임에서 자유로워집니다. 사탄과 귀신같은 영적 매임에서 자유로워집니다. 로마법이나 관리와 같이 사람에게 매인 것에서 자유로워집니다. 인간의 관습이나 제도로부터 자유로워집니다. 세상의 사상이나 율법의 매임에서 자유로워집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8:32) 이것이 구원이 가져다주는 최대의 신령한 선물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를 얻은 사람은 표면적인 상황에 매이지 않습니다. 이전에 간수와 바울은 표면적으로 간수와 죄수의 입장이었습니다. 간수는 자유인이고 바울은 매인 자였습니다. 그러나 이면적으로는 반대였습니다. 바울은 영혼의 자유를 누렸습니다. 감옥에 갇히고 매였어도 영적으로는 자유롭게 찬송하고 감사했습니다. 그와 반대로 간수는 몸은 자유로웠지만 마음은 사탄에 매이고 사람에게 매여서 한 순간 자신을 칼로 찌르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바울이 전해 준 복음으로 자유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롬 8:1)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갈 5:1) 오늘 주 안에서 바로 이 자유를 얻으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 변화는 사랑과 긍휼의 회복입니다.

전날의 간수의 모습과 오늘의 간수의 모습을 비교해 보세요. 전날에 그는 단지 죄수를 다루는 간수로써 인간을 인간답게 대접하지 않았습니다. 매를 많이 맞고 상처 난 죄인에게 사정없이 차꼬를 채워서 깊은 감옥에 던져 넣었습니다. 사랑과 긍휼은 물론 일말의 동정심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런 그가 이제는 죄수를 불쌍히 여기고, 씻기고, 상처를 싸매주고 있습니다. 악한 영이 지배하는 세상은 사랑과 긍휼이 메말라 갑니다. 주님은 종말의 징조로써 사람들이 마음에서 사랑이 식어지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마24:12) 오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잃어버린 사랑과 긍휼을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세 번째 변화는 두려움 없는 내면의 평안이 회복된 것입니다.

구원 받기 이전의 간수를 보세요. 그는 두려워했고, 놀랐고, 불안해했고, 자결까지 하려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모든 두려움과 불안을 떨쳐버렸습니다. 그는 더 이상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고 있습니다. 로마의 법률이나, 자신의 상관들이나, 총독에게 받는 처벌이나 어떤 것도 두려워 않습니다. 죄수를 풀어주고 감옥 밖으로 인도하여 대접함으로써 일어날 모든 결과에 대해서 전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알고 두려워하게 되면, 하나님 외의 어떤 존재도 두려워 않게 됩니다! 구원 받은 성도들은 오직 하나님만 두려워하면 됩니다.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내면의 평안! 바로 이 평안을 오늘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네 번째 변화는 기쁨의 회복입니다.

“그와 온 집안이 하나님을 믿으므로 크게 기뻐하니라.”(34) 본문의 배경은 감옥입니다. 감옥은 많은 상징성이 있는 장소입니다. 감옥은 어둡고 침침합니다. 빛이 없습니다. 빛은 생명을 상징합니다. 빛은 정의를 상징합니다. 빛은 희망이요 기쁨을 상징합니다. 빛이 없다면 이 모든 것이 없는 곳입니다. 생명도 없고, 정의도 없고, 희망도 없고, 기쁨도 없습니다. 감옥은 죄수들이 있는 곳입니다. 죄 값으로 처벌 받는 고통의 장소입니다. 거기서 하루 종일 죄수들만 바라보는 간수의 삶은 어두움 그 자체였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예수님을 영접하고 크게 기뻐하고 있습니다. 온 가족이 큰 기쁨을 얻었습니다. 구원의 감격과 기쁨! 해방의 기쁨, 자유의 기쁨, 하나님 자녀로서의 기쁨, 평안의 기쁨, 영생의 기쁨, 하나님과 함께하는 기쁨, 천국 소망의 기쁨. 오늘 이 모든 기쁨을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간수와 그 가족을 전도한 것은 바울의 빌립보 전도에서 절정의 부분입니다. 앞서서 있었던 루디아 전도, 점치는 귀신을 쫓아낸 사건과 함께 간수 가족 전도는 빌립보 전도에서 가장 은혜로운 전도 장면입니다. 바울이 죄도 없이 매 맞고 감옥에 갇혔을 때만 해도 억울하기 그지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감옥 속에서 일가족 전체를 구원하도록 섭리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오늘 나를 통해서 어떤 방법으로 다른 사람들을 구원하실는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형편이 좋든지 나쁘든지 낙심 말고 영혼 구원에 힘쓰시기 바랍니다. 요셉은 감옥에서 정부 고관을 만나는 바람에 출세의 길이 열렸습니다. 오늘 내 형편이 나쁘다고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마세요. 감옥 속에서 찬송하고 감사하는 가운데 지진이 나고 옥문이 열리고 구원의 역사를 이루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