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치는 여종을 주 예수의 이름으로 고치다.
사도행전16장16절~18절

바울이 마게도냐 빌립보성에서 전도하던 중 귀신들려 점치는 여자를 고쳐 주었다는 기사입니다. 빌립보는 알렉산더 대왕의 아버지인 빌립이 건설하고 자기 이름을 따 빌립보라 불렀던 도시입니다. 지리적으로는 간기데스(Gangites) 강가에 있었기 때문에 땅이 비옥했고, 부근에는 판게우스(Pangaeus) 산이 있었는데 금광으로 유명한 산이 있는 곳 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사건의 경위와 해결 방법을 찾고, 주시는 교훈이 무엇인지를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1. 바울과 실라는 어떻게 귀신들린 여종을 만났습니까?

13절을 보면 “안식일에 우리가 기도처가 있는가하여 문 밖 강가에 나가 “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가는 곳마다 회당을 찾아가 예배 드리고 거기서 성경을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어디서나 기도해도 되지만 기도처로 정해진 곳을 찾아가 기도했습니다. 아무데서나 있는 곳에서 예배드릴 수 있고, 어느 곳에서나 기도할 수 있지만 바울은 정한 곳을 찾아 예배하고 기도드렸습니다. 예루살렘에 사는 사람들은 하루 세 번씩 성전에 가서 기도를 드렸고, 먼 거리에 떨어져 있는 사람들은 성전 있는 쪽을 바라보며 기도했습니다. 그것은 성전을 떠나거나 멀리하면 안 되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집사가 주일에 친구 세 사람과 함께 낚시를 하러 갔습니다. 낚시를 물에 던진 지 30분만에 월척에 해당하는 물고기를 잡게 되었습니다. 다른 친구들은 파리 날리고 있는데 집사만 월척을 한 것입니다. 그는 낚싯대를 들어올리며 속으로 “할렐루야다 “를 외쳤습니다. 물고기를 바구니에 넣어 물속에 담가두었습니다. 그리고 너무 신기하고 기분이 좋아 월척인 물고기를 들여다보곤 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물고기가 입을 벌렸다 오무렸다 하면서 말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임마, 집사라는 작자가 주일에 교회는 안가고 낚시터에 쪼그리고 앉아서 남의 콧구멍이나를 꿰고 앉아있니? 너 나하고 원수 맺은 일 있느냐? 이 잡사야! ” 그는 깜짝 놀랐습니다만 그것은 환청이었습니다.
그는 주섬주섬 도구들을 챙겨 자리를 떴습니다. 물고기는 도로 물에 넣어주고 친구들에겐 집에 급한 일이 생겼다며 양해를 구하고 4킬로 떨어진 동네 교회를 찾아가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기 일생동안 그 날 그 예배처럼 부끄럽고 감격스런 예배는 처음이었다고 간증했습니다. 사도행전 1:4을 보면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고 했습니다. 그리하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고 했습니다. 사도행전 3장을 보면 베드로와 요한이 기도하러 성전으로 올라가다가 구걸하는 앉은뱅이를 만났습니다. 기도하러가다가, 기도하다가, 예배드리러 가다가, 예배하다가 은혜를 받고 능력을 받고 기적을 체험합시다.
기도는 하러가면서부터 응답을 받고 은혜를 받게 됩니다. 예배도 드리러 떠나면서 집에서 준비하면서 차를 타고 가면서 성전에 들어와서 은혜를 받게 됩니다. 한평생 기도로 살았던 죠지뮬러의 이야기를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는 그 누구에게도 직접 도움을 요청하지 않고 오직 기도만으로 2,100명의 고아들과 10개의 학교를 운영했습니다. 189명의 선교사를 돕고, 9,000명의 학생들에게 학비를 지원했습니다. 해마다 400만 부의 소책자와 수 만권의 성경을 선교지에 보냈습니다. 어떤 날 그가 매일 장사하는데 16시간을 쓰는 사람을 방문했습니다. 그의 몸은 지쳐 병들어있었고, 영혼은 메말라 있었고,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기쁨도 떠난 지 오래였습니다. 그에게 뮬러는 당신이 다시 살기를 원한다면 일하는 시간을 줄이고 하나님 말씀을 읽고 기도해야 속사람이 힘을 얻어 건강하게 되리라고 충고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내가 하루에 16시간을 일해도 먹고살기가 힘든데 일하는 시간을 줄이면 가족들과 나는 굶어 죽고 말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때 뮬러는 “이건 아니다. 이렇게 살아선 살아도 죽는다. 나부터 삶과 신앙의 태도를 바꿔야 되겠다 “라고 결단하고 사람에게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시작했습니다. 뮬러가 80대 노구를 이끌고 신학교에서 강의를 하고 있었습니다. 강의가 끝날 무렵 한 학생이 질문을 던졌습니다. “선생님은 어떻게 일평생 만 여명의 고아들을 먹여 살렸으며 10만 여명의 주일학교 아이들을 도울 수 있었으며 허드슨 테일러를 비롯한 많은 선교사들에게 수 만권의 성경을 보낼 수 있었습니까? ” 뮬러는 앉아있던 의자에서 말없이 천천히 일어서더니 의자 위에 손을 얹고 무릎을 꿇고 앉았습니다. 그리고 두 손으로 깍지를 끼고 눈을 감았습니다. 그리고는 조용히 일어나더니 말했습니다. “이게 비결이요, 나의 비결은 이것뿐이요! ” 하나님이 베푸시는 기적의 주인공이 되기를 원한다면! 불가능을 제치고 가능의 세계로 나가기를 원한다면! 고통과 절망의 숲을 헤치고 빛 가운데로 걸어가기를 원한다면! 사단의 도전과 시험을 이기고 승리하기를 원한다면! 바울처럼 베드로처럼 뮬러처럼 기도합시다. 바울은 기도처로 기도하러 가다가 점치는 여인을 만나 고쳤습니다.

2. 귀신들린 여종에 대하여 연구하여 봅시다.
⓵그녀는 돈 벌어주는 수단 이었습니다.

16절을 보면 “점으로 그 주인들을 이하게 하는자라 “고 했습니다.
그녀는 귀신들려 귀신의 힘으로 사람의 운명을 점치는 여자였습니다. 그리고 그녀의 배후에는 주인 여러 명이 돈을 챙겨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16절을 보면 “주인들 “이라고 복수 표현했습니다. 그녀가 점쳐서 버는 돈을 주인들이 공동분배 했던 것입니다.
그녀는 귀신에게도 사로잡혔고 그 주인들에게도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 주인들이 어떻게 해서 귀신들린 여자의 주인들이 되었는지에 대해선 언급이 없습니다. 그녀의 전 남편이거나 가족이거나 친척이었을 것이라고 봅니다. 그들은 병든 사람, 귀신에 사로잡혀 자아를 상실한 여인을 내세워 돈을 챙기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내 주인은 누굽니까? 나는 누구에게 그 무엇에게 사로잡혀 있습니까?
마귀에게 사로잡히면 마귀의 종이 됩니다. 죄에 사로잡히면 죄의 종이 됩니다. 그렇게 되면 마귀가 하라는 대로 해야하고, 죄가 조종하는 대로 따라가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마약에 붙잡히고, 어떤 사람은 술에 붙잡히고, 어떤 사람은 이성에 붙잡히고, 어떤 사람은 돈에 붙잡혀 끌려 다닙니다.
마귀가 끌고 가는 곳이 어디입니까? 그곳은 죽음, 멸망, 지옥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사로잡히면 하나님의 종이 됩니다. 하나님의 종이 되면 자유, 평화, 행복, 형통을 주십니다. 그녀는 귀신에게 속했기 때문에, 나쁜 주인들에게 속했기 때문에, 불행했고 유린당했고 착취당했습니다. 하나님께 소속됩시다.

⓶귀신은 부정적 다양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17절을 보면 “쫓아와서 소리 질렀고 ” 바울과 그 일행을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 “고 떠들어댔습니다. 그리고 18절을 보면 바울을 여러 날 동안 따라다니며 괴롭혔다고 했습니다. 마가복음 5장을 보면 귀신들린 남자이야기가 기록되어있습니다. “무덤사이에 살고 쇠사슬도 끊어버리고 소리 지르고 돌로 제 몸을 상하고 “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귀신이 예수님에게 달려와 내뱉은 말입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원컨대 하나님 앞에 맹세하고 나를 괴롭게 마옵소서.” 사도행전 16장의 귀신 역시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 구원의 길을 전하는 자 “라고 떠들어 댔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아는 것과 믿는 것은 차이가 있다는 것을 발견해야 합니다. 믿음이라는 단어 가운데 「페이도」가 있습니다. 그 뜻은 참과 거짓을 구분하여 확신한다는 것입니다. 귀신도 예수님이 누구이며, 바울이 누구인 것을 압니다. 사도행전 19:15을 보면 귀신들린 사람이 “예수도 내가 알고 바울도 내가 안다 “고 했습니다. 그러나 귀신은 예수님을 “나의 구주 하나님 “이라고 믿고 고백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아버지 “라고 고백하지 못합니다. 귀신은 좋지 않은 다양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재주도 있고, 수단도 있고, 능력도 있고, 장래 일도 맞추고, 예수님에 관한 지식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혜가 있어서 우리보다 먼저 인터넷 사이트를 점령하여 음란물을 띄우고, 불온사상을 띄우고, 남을 욕하고 비방하고, 협박하는 글을 띄웁니다. 신학을 동원하고, 예술을 동원하고, 문학을 동원하고, 폭력을 동원해서 교회를 파괴하고, 신앙을 파괴하고, 예수를 공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걱정할 것 없습니다.

3.바울은 귀신이 어떻게 쫓아냈습니까?

18절을 보면 ” 그 귀신에게 이르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 하니 귀신이 즉시 나오니라.”고 했습니다.
무당이나 점쟁이는 굿을 하고 춤을 추고 복채를 놓고 귀신을 불러들이기 위해 꽹과리를 두들기고 소리를 지릅니다. 그러나 바울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명령했습니다.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고 사도행전 3:6을 보면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일어나 걸으라 “고 했습니다. 사도행전 4:10을 보면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고 했습니다. 누가 복음 10:17을 보면 “주의 이름으로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라고 했습니다. 빌립보서 2:10을 보면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들이 예수 이름 앞에 무릎을 꿇는다 “고 했습니다. 칼춤을 추며 굿을 하던 무당이 주일학교 다니는 어린아이가 다가가면 굿을 못합니다. 귀신이 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목사가 다가가도 끄떡없이 춤추고 소리 지르는 무당이 있습니다. 그건 돌팔이 무당입니다. 예수 이름만 들어도 귀신은 떨고 물러갑니다. “그에게서 나오라 하니… ” 그 다음이 중요합니다. “즉시 나오니라. ” 미루지도 못합니다. 거절도 반대도 못합니다. 즉시 명령에 복종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토록 위대한 능력을 가지신 예수님이 나의 구주십니다. 나의 능력이십니다. 나의 생명이십니다. 나의 소망이십니다. 나의 행복이십니다. 나의 전부이십니다. 아멘

“돌이켜 그 귀신에게 이르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 하니 귀신이 즉시 나오니라.”(18)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의지하고 사용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의 모든 능력은 내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의지하는 데서부터 나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주님의 이름을 부르고 의지해야 합니다.

일찍이 주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의 이름을 사용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요14:13-14)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요16:24)
이러한 주님의 말씀대로 사도들은 주님의 이름을 의지하고 사용했습니다. 병을 고칠 때에도, 귀신을 쫓아낼 때에도, 주님의 이름을 사용했습니다. “베드로가 가로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하고”(행 3:6) 돌이켜 그 귀신에게 이르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 하니 귀신이 즉시 나오니라.”(18) 오늘 그리스도인들이 무기력한 이유는 내 이름을 의지하고, 내 이름을 내려고 하고, 내 힘과 내 지식, 내 지혜를 의지하려 하기 때문에 무기력한 겁니다. 주님의 이름을 의지하고, 주님을 높이고, 주님 이름을 사용하면 주님께서 역사하십니다.
주님의 이름을 높이는 것은 우리의 사명이며 의무입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예수그리스도가 존귀하게 하려 하나니”(빌1:20) 이것이 바로 사도 바울의 삶의 철학입니다. 요한계시록에 보세요. 영원 천국에서 성도들이 하는 가장 중요한 일이 뭡니까? 주님의 존귀하신 주님의 이름, 명예를 높여드리는 일입니다. “큰 음성으로 가로되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이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하더라. 내가 또 들으니 하늘 위에와 땅 위에와 땅 아래와 바다 위에와 또 그 가운데 모든 만물이 가로되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 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능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 하니, 네 생물이 가로되 아멘 하고 장로들은 엎드려 경배하더라.”(계5:12-14) 오늘날 왜 내가 수치를 당하고, 부끄러움을 당합니까? 내가 왜 패배자가 되며,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고 눌리는 자가 됩니까? 주님의 이름이 아니라 내 이름이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살아서 내 영광, 내 고집, 내 뜻대로 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이름을 폼으로 부르고 실제로는 “나여, 나여!” 하니까 주님의 이름이 힘을 내실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주기도를 합니다. “주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소서!” 말로만 그렇게 기도하지 말고, 진정으로 주님의 이름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천천만만의 귀신이나 사단이 다가온다 해도 다 도망갑니다. 내가 무서워서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무서워서 귀신은 놀라자빠집니다. 소리 높이 외칩시다. “악하고 더러운 귀신아 내 인생에서 떠나가라!”

미국 코넬대학에서 개구리 실험을 했습니다. 개구리 한 마리를 찬물이 담긴 유리그릇에 넣고 그 유리그릇을 벤젠 등이 켜있는 불 위에 올려놓았습니다. 그리고 1초에 화씨 0.017도씩 온도가 올라가도록 했습니다. 온도가 너무나 서서히 올라가기 때문에 개구리는 온도의 변화를 전혀 느끼지 못합니다. 그래서 태평스럽게 움직이고 헤엄치며 돌아다닙니다. 그러나 두시간 반이 지나자 개구리는 뜨거운 물에 푹 삶아져서 죽었습니다.
미지근해질 때 낌새를 채고 뛰쳐나왔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 때를 놓친 것입니다. 작은 일이라고, 대단찮은 일이라고, 한번정도라고, 이번만은 괜찮겠지 라며 마귀의 유혹에 넘어가지 맙시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명합시다.
“더럽고 사악한 귀신은 물러가라 ”
“내 인격과 신앙을 파괴하는 귀신은 물러가라 ”
“교회를 헐고 파괴하려는 귀신도 물러가라 ”
“가정을 깨고 인간관계를 깨고 국가 공동체를 파괴하려는 사단도 물러가라 ”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 물러가라.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