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이 환상을 보다.
사도행전16장6절~10절
위대한 사도 바울과 같은 사람도 아시아에서 실패하고 비 두니아에서 낭패하고 좌절과 절망으로 드로아의 밤에 깨어져 엎드려 자신이 주인이 아니라 하나님이 삶의 주인인 것을 깨닫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주신 제3의 인생의 계시를 따라 나가서 온 유럽과, 그 결과로 세계가 복음화 되는 기적을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지 아니하시는지라, 무시아를 지나 드로아로 내려갔는데,(6-8)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가로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바울이 이 환상을 본 후에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 (행16:6-10)
1. 성령의 막으심을 어떻게 이해하였습니까?
오늘 말씀의 주제는 성령의 인도하심입니다. 바울의 전도 여정은 철저하게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진행되었습니다.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지 아니하시는지라,”(6-7)
바울은 제2차 전도여행에서 아시아 전도를 주된 목표로 삼으려고 했습니다. 여기서 아시아란 지명은 오늘날의 아시아 대륙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본래 아시아란 명칭은 바울 당시 한 지방의 명칭이었습니다. 오늘날 터키 영토의 서쪽 지방, 지중해 연안 지역을 가리키는 이름입니다. 오늘날의 터키 지역을 바울 당시의 지역 명칭으로 구분한다면, 동쪽으로는 갑바도기아, 중부 지역은 갈라디아, 남부 지역은 루기아와 밤빌리아 길리기아, 북부 지역은 비두니아, 서북 지역은 무시아, 서쪽 지역은 아시아로 불려졌습니다.
바울은 우선 아시아에서 전도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아시아는 오늘날 터키의 서쪽 지역으로 BC133년 로마의 직할 주가 되었고, 그 주도는 유명한 에베소였습니다. 바울은 제1차 전도여행 때에 들렸던 비시디아 안디옥, 이고니온, 루스드라, 더베 지역을 거치면서 아시아 전도를 염두에 뒀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무슨 연유에서인지는 몰라도 성령께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고, 그 길을 막으셨습니다.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예수의 영이 허락지 아니하시는지라,”(6,7,)
어떤 식으로 막으셨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천재지변으로 길이 막혔는지, 전염병이 돌았는지, 관리들이 전도활동을 못하게 했는지, 아무튼 바울은 아시아에서 제대로 전도활동을 하지 못했습니다.
복음 전하는 일은 분명히 선한 일입니다. 주님께서 권장하신 일이요 명령하신 일이기도 합니다. 그런데도 성령께서 그 일을 막으셨습니다. 이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누가 보더라도 선하고 옳은 일인데 하나님께서 하지 못하게 하시는 일이 있는가? 그렇습니다. 충분히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본문에서 찾을 수 있는 한 가지 이유는 하나님의 때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복음 전도는 하나님의 때를 따라 해야만 합니다. 아시아 전도는 바울의 제3차 전도여행 때에 이루어졌습니다. 그 때에 바울은 에베소에 무려 2년 3개월이나 머물면서 복음을 전했고 많은 사람들을 구원했습니다.(행19장) 하나님이 정하신 제2차 전도여행의 주 목적지는 유럽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뜻을 무시하고 무조건 나아간다면 무모한 도전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말을 합니다. 이 때에 바울이 서쪽으로 가지 않고 동쪽으로 갔다면 아시아와 대한민국은 세계 역사에서 가장 먼저 기독교 국가가 되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복음은 유럽으로 건너갔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셈의 장막에서 야벳이 창대하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입입니다.(창9:26- 27) 처음 열두 제자들을 보내시면서 주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 열둘을 내어 보내시며 명하여 가라사대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차라리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마 10:5)
이방인은 물론 사마리아도 일차 전도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오순절 성령이 강림하실 때에는 복음이 점차적으로 열려져서 땅 끝까지 향하게 하셨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1:8)
세상 끝까지 목표가 정해졌다 해도 그 가는 길은 하나님이 정하신 때와 절차를 따라서 해야만 합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때를 따라 행동해야 합니다. 현재 내가 가는 길이 막혔다면 좌절하고 낙심하기 전에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왜 내 길을 막으시는가? 혹시 하나님의 때가 아닌 것은 아닌가? 하나님은 이삭이 애굽으로 가는 길을 막으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이삭에게 나타나 가라사대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고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에 거하라”(창 26:2)
그러나 하나님은 야곱에게는 애굽으로 내려가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하나님이라 네 아비의 하나님이니 애굽으로 내려가기를 두려워 말라 내가 거기서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내가 너와 함께 애굽으로 내려가겠고 정녕 너를 인도하여 다시 올라올 것이며 요셉이 그 손으로 네 눈을 감기리라 하셨더라.”(창46:3-4)
이삭은 애굽에 내려가지 않음으로써 큰 복을 받았고, 야곱은 애굽에 내려감으로서 큰 복을 받았습니다. 애굽에 내려가더라도 아무 때나 내려갈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때에 내려가야 합니다. 가나안 정탐 후에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전투를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너희 중에 계시지 아니하니 올라가지 말라 너희 대적 앞에서 패할까 하노라”(민 14:42)
그런데도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허락지 않는 전투를 시작했다가 크게 패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정하신 때에 전진할 때에는 큰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내가 갈 길을 아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내가 가서는 안 되는 길을 아는 것도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때때로 내가 갈 길을 보여주시기 전에 내가 가지 말아야 될 길을 보여주십니다. 때로는 내 길을 막으십니다. 때로는 옳은 일도 하지 못하게 하십니다. 여러 경로를 통해서 내가 하는 일을 가로막으십니다. 인간관계가 원만하지 못하게 하십니다. 사업상의 길을 막으십니다. 결혼 문제, 자녀 문제, 건강상의 문제 등등. 여러 가지 문제들을 동원하셔서 내가 하는 일을 못하게 하십니다. 그 때에 낙심하지 마세요. 겸손히 하나님께 엎드리세요. 하나님 왜 내 길을 막으십니까?
우리는 영적 미성년자들입니다. 인생의 미성년자들이기도 합니다.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영적 나이는 미성숙입니다. 바른 길을 모르고, 최선의 길을 모르고, 유익된 길을 모릅니다. 미성년자가 떼를 쓴다고 무조건 들어주시겠습니까? 하나님은 내가 바른 길, 최선의 길, 유익된 길을 찾기까지 내 길을 가로막고 계실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모든 길을 다 막고 계신 것은 아닙니다. 열린 길도 있습니다. 바울이 비두니아로 가는 길은 막혔지만, 브루기아, 갈라디아, 무시아 행로는 열렸습니다. 하나님께서 막으시는 길로 가지 말고 열려진 길로 가시기 바랍니다.
2. 마게도니아 인의 환상을 통해 무엇을 깨달았습니까?
바울이 막혀진 길로 고민하고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무시아를 지나 드로아로 내려갔는데,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가로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바울이 이 환상을 본 후에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 (행16:8-10)
이 때에 바울은 무시아를 지나 드로아로 내려갔습니다. 무시아는 오늘날 보스포러스 해협을 끼고 있는 터키 서북단의 지역입니다. 드로아는 무시아의 해변에 연한 항구로 유명한 트로이에서 약 6km 떨어진 곳에 있습니다.
바울이 드로아에 머물 때에 밤에 환상이 보였습니다. 환상은 꿈과 같이 잠 잘 때에 보이는 게 아니라, 생시에 보이는 현상입니다. 사도행전에는 환상을 보는 장면이 많이 나타납니다.(7:31, 9:10,12, 10:3,17,19, 11:5, 12:9, 16:9, 18:9) 바울이 본 환상은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손짓하며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는 모습이었습니다. 마게도냐는 현재 그리스 북부 지역으로 알렉산더의 고향이기도 합니다. 바울이 통과한 빌립보, 데살로니가, 베뢰아 등의 도시가 바로 이 마게도냐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마게도냐 사람의 환상은 바울이 나아갈 길을 보여준 하나님의 계시였습니다. 바울은 이 환상을 보면서 왜 아시아에서의 전도가 막히게 되었는지 이유를 깨달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쪽 방향으로 나를 부르시는구나!
막힌 길과 열린 길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는 것이 은혜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질문을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흔히 이런 권면을 합니다. 첫째로, 하나님 말씀에 비춰 보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뭐라고 말씀하시는지?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열심히 경청하세요. 설교를 통해서, 성경 읽기를 통해서, 혹은 묵상을 통해서. 둘째로, 주의 종, 혹은 예수 믿는 그리스도인들을 통해서 조언을 들으세요. 때로는 불신자들까지, 바울이 마게도냐 사람의 손짓을 본 것처럼 혹시 사람들의 손짓에 하나님의 뜻이 담겨 있지는 않는지? 오늘 내가 만나는 수 많은 사람들의 손짓 속에 하나님의 메시지가 들어 있을지 모릅니다. 셋째로, 내 자신에게 의욕과 의지가 있는지 살펴 보세요. 하나님께서는 어떤 일을 이루시고자 자기 자녀들에게 선한 의지와 욕구를 주십니다. 바울이 아시아 전도를 원했듯이, 혹은 비두니아로 가기를 원했듯이 하나님은 우리에게 선한 의욕을 주십니다. 넷째로, 환경의 변화를 관찰하는 일입니다. 바울이 아시아로 혹은 비두니아로 가려는 길은 막혔습니다. 그 막힘이 천재지변과 같은 자연 현상인지, 아니면 정치 사회적인 격변인지, 관리들의 방해인지, 신상의 문제인지 알 수는 없습니다. 어찌되었든지 바울의 전도는 막히고, 바울이 가려던 길은 막혔습니다. 그리고 무시아로 드로아로 가는 길은 열렸습니다. 그리고 마침내는 마게도냐 사람의 환상을 보았습니다. 바울은 막힌 길과 열린 길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알아냈습니다.
오늘 내가 가려는 길이 막혔습니까? 내가 하려는 일이 뜻대로 안 되나요? 이것도 막히고 저것도 막혔습니까? 그렇다면 열린 길은 없습니까? 하나님께서 남겨 두신 길이 혹 있는지 살펴 보세요. 쥐를 가지고 실험을 한 결과가 있습니다. 미로와 같은 길을 만들어 놓고 한 곳에 먹이를 놔 두면 쥐가 어떻게 할까요? 수 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마침내 먹이가 놓인 곳을 찾아냅니다. 막힌 길은 가지 않고 열린 길을 찾아 가는 반복적인 시행착오을 통해서입니다. 그런데 쥐보다 훨신 지능이 높은 사람은 자기가 가려고 하는 길만 고집하여 목표물을 찾아내지 못하고 포기해 버립니다. 쥐만도 못한 인생입니다. 오늘 혹시 마게도냐 사람의 손짓이 있는지 바라보세요. 그리고 그 손짓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하나님의 뜻을 알아내시기 바랍니다.
3. 우리는 성령의 인도하심에 얼마나 맡기고 살고 있는가?
흔히 사도행전은 성령행전이라고 합니다. 사도행전에 기록된 거의 모든 내용이 성령의 주권적인 섭리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기다리라는 주님의 명령(1:4), 천사의 재림 예언(1:11), 맛디아를 뽑은 제비뽑기(1:23-26), 오순절 성령 강림과 복음 증거(2:1-41),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을 통하여 거짓을 심판하신 일(5:1-11), 스데반 집사님의 기사와 표적(6:8-9), 성령 충만과 순교(7:55), 빌립의 사역에 주의 사자가 나타나신 일, 구스 내시의 전도(8:26), 바울 회심(9장), 고넬료 가정 구원(10장, 11장), 베드로 사도를 감옥에서 풀어주신 일(12:11), 최초의 선교사 파송(13장), 바울의 안디옥, 이고니온, 루스드라 전도 사역(14장), 바른 교리를 결정한 예루살렘 종교회의(15장), 빌립보 간수장의 가족 구원(16장), 바울의 고린도 전도에 나타난 주님의 격려(18:9-10), 바울의 두란노 서원 사역, 거기서 일으킨 기적과 표적, 신유(19:11-12), 바울의 예루살렘 행을 결행케 된 일 등등(20:22), 모든 일이 다 성령의 인도로 이루어졌습니다. 복음 전파, 일군 선출, 교리적 결정, 기적과 표적, 신유, 회개, 구원, 행선지 결정, 마음의 결심, 격려와 위로 등등. 다양한 일과 사역들이 다 성령의 인도로 이루어졌습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내 인생에 주권적으로 개입하심을 인정하시기 바랍니다. 다윗은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내 걸음을 넓게 하셨고 나로 실족지 않게 하셨나이다”(삼하22:37) “여호와께서 사람의 걸음을 정하시고 그 길을 기뻐하시나니”(시37:23)
다윗을 목동들 가운데서 왕으로 뽑으신 일, 사울을 폐하고 다윗을 흥하게 하신 일, 수 많은 전쟁의 승리, 반란이나 반역을 제압한 일, 자손과 왕위를 계승하게 하는 일들이 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개입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다윗은 그 하나님께 이렇게 소원의 기도를 드립니다.
“이제 청컨대 종의 집에 복을 주사 주 앞에 영원히 있게 하옵소서 주 여호와께서 말씀 하셨사오니 주의 은혜로 종의 집이 영원히 복을 받게 하옵소서”(삼하7:29)
엘리후는 고백을 합니다.
“그가 내 길을 감찰하지 아니하시느냐 내 걸음을 다 세지 아니하시느냐?”(욥31:4) “하나님은 사람의 길을 주목하시며 사람의 모든 걸음을 감찰하시나니”(욥34:21)
오늘 내 삶의 길에도 하나님의 간섭하심은 중단 없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영혼의 일, 육신의 일, 물질적인 일, 인간관계, 성전의 직임, 직업적인 일, 사회적 직임 등등, 모든 일에 성령님이 개입하십니다.
그러므로 오늘 성령의 인도하심에 유의하여 내 모든 삶의 길들을 결정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내 길을 막으시는가? 혹은 허용하시는가? 지금 내가 하는 일을 하는 것이 하나님이 정하신 시기인가 아닌가? 하나님께서 내게 보여주시는 비전은 없는가?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깨달았거든 지체 없이 실행에 옮겨야 합니다.